교수님, 안녕하셨어요.
벌써 20년이 더 지났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마도 저를 기억하시진 못하실 거예요. 교수님의 시선이 잘 닿지 않을만한 곳에 제가 주로 앉았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의 수업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교수님의 수업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교수님 특유의 억양, 표정, 손짓, 그리고 조금 썰렁했던 농담까지. 이렇게 명료한 기억으로 떠오르게 될지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15년째 PD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게 될지 그 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죠. 교수님의 언론학 개론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저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던 1학년 신입생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의 모든 첫 경험은 이토록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 법인가봅니다.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꿈꾸어야 할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같습니다가 아니라 분명 그랬습니다.
언론인은 국민으로부터 위탁 받은 권리를 오직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죠. 국민의 눈을 대신하는 눈이 되어, 국민의 귀를 대신하는 귀가 되어, 국민의 입을 대신하는 입이 되어 쉴 새 없이 현장을 누벼야 하는 게 언론인의 숙명이라 하셨죠. 장차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우리들은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교수님은 절대 알 수 없으셨겠지만 그 때 저만치 창가에 앉아있던 저는 마치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그 느낌의 정체가 도대체 뭔지 그 땐 알 수 없었어요. 그냥 저는 그 느낌이 이끄는 곳으로 이미 달려가고 있었어요.
교수님, 정말 세월 빠르죠. 저도 이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건, 오로지 지향해야 할 곳은 시청자뿐이라는 사명이 법으로 규정된 공영방송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 가슴 뛰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 제 자신에겐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그 위안은 오히려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에 머리만 지끈거리도록 뜨겁습니다.
상식선의 주장을 고수하던 언론인들이 무더기로 징계를 당했습니다. 상식을 말하는 프로그램에 이념을 덧칠해 몰아붙입니다. 친정부 성향을 노골화한 매체에는 낯 뜨거운 특혜를 줍니다. 그런데도 침묵합니다. 침묵이 무슨 언론인의 덕목이라도 되는 것인 양 침묵합니다.
교수님, 저는 언론학 개론에서 배운대로의 세상을 바라진 않습니다. 아마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교과서에 담긴 평화롭고 정의로운 글귀 속엔 언론의 자유를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였을 피맺힌 역사가 엄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는 교과서의 평화롭고 정의로움이 현실에서 구현되길 바란 게 아니라 평화롭고 정의로운 현실을 지향하는 언론인들의 임무가 그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바랐습니다.
교수님, 한 말씀만 해주세요. 이 시대 언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0년 만에 세상이 바뀐 거라면, 그래서 바뀐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면 언론학 개론을 다시 써주세요. 그런 게 아니라면 말씀해주세요 교수님. 이건 잠시 잘못된 것이라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바로 잡으라고. 이건 정말 처음 든 생각입니다. 혼내주세요, 교수님. 혼나고 싶습니다. 그래야 지금 언론학 개론 시간에 저만치 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
김한중 EBS 지식채널e PD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