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극장가를 찾은 한국영화는 12일까지 170편. 편수는 많은데 여느 해보다 흉작이라는 평이 많은 한 해였다. 하지만 절창과도 같은 장면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데운 영화는 여럿 있었다. 일년에 숱한 영화들과 만나는 영화평론가들의 마음을 울린 장면들은 무엇일까. 영화평론가 5명이 꼽은 올해 한국영화의 명장면을 소개한다.
● '고지전'의 애록고지 마지막 전투
"공간의 형상화… 강렬한 이미지로"
휴전협정 발효를 코앞에 두고 고지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남북 병사들이 사투를 벌이는 광경.
"장훈 감독이 '고지전'을 전쟁영화가 아닌, 전장영화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전장이 주인공으로 적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반전ㆍ反戰)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한다. 영화가 드라마보다 공간의 형상화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흥행이 잘 안됐는지 모르지만 이 장면은 두고두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전찬일
●'만추'의 키스
"대사 없지만 순수함 가득 잡아내"
쫓기는 남자(현빈)와 특별휴가를 나온 여죄수(탕웨이)가 짧은 만남 뒤 이별을 예감하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
"주인공 남녀가 각자의 마음 속 좌절과 아픔을 서로 주고받고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다.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느낌을 가득 잡아낸 키스 장면이다. 아무런 대사도 없지만, 둘이 그 동안의 만남을 뒤로 하고 이제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마음 속 아픔과 연민, 아쉬움, 동정을 나누는 장면이라 더 큰 울림을 준다." -오동진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
"인간의 돌변, 과묵하게 잘 보여줘"
남한사회에 겨우 적응한 탈북자 승철(박정철)이 자신이 정을 주며 아끼던 개의 죽음을 무표정한 얼굴로 외면하게 되는 장면.
"영화의 수준을 한 순간에 높이 올려주는 장면이다. 한 인간이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완전한 괴물로 탄생하게 되는 순간을 아주 과묵하게 별다른 수식 없이 잘 보여준다. 이 마지막 장면 하나로 '무산일기'는 강력한 영화가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고지전'의 신일영(이제훈)이 연설하는 장면도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알리는 듯해 인상적이었다." -김영진
●'써니'의 시위배경 난투극
"시대 이미지 통쾌하게 재해석"
나미(심은경) 일행이 도심에 나갔다가 라이벌 패거리와 마주친 뒤 시위대와 전경들 사이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
"여고생들의 짙은 연대의식으로 1980년대 격변을 재해석하는 장면이 유쾌하면서도 코믹해서 좋았다. 당시 고고장에서 맨날 듣던 팝송 '터치 바이 터치'가 시위대들의 모습과 섞이면서 이질적인 조화를 만들어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대학생들의 모습으로 굳어진 시대의 이미지를 비틀고 도발적으로 접근해서 상큼하면서도 통쾌했다." -심영섭
●'완득이'의 모자 해후
"해체된 가정에 희망의 열쇠로"
장애인 아버지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 방황하던 완득이가 외국인 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가족의 소중함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장면.
"어머니가 완득이에게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요. 한번만 안아봐도 돼요?'라고 묻는 장면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해체된 가정과 다문화 가정의 아픔, 그리고 화해의 손짓을 조용히 표현해냈다. 이 장면과 함께 완득이가 아버지가 일하는 장터의 신발가게에서 어머니에게 구두를 사주며 '우리 엄마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둘 사이를 잇는 희망의 열쇠 같다." -정지욱
정리=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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