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내 할 말은 다했습니다." 그는 짧게 답한 뒤 입을 닫았고, 서둘러 행사장을 벗어났다. 따라가며 질문을 계속 던졌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를 보좌하던 한 감독의 몸에 떠밀리고, 행사진행 요원에 저지당해 더 이상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 상영회가 끝난 직후의 일이다. 2006년 '시간'의 개봉을 앞두고 자신은 한국에 영화를 수출했을 뿐이라며 한국영화 팬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던 때보다 더 완강한 배척이었다.
'아리랑'을 보면서 그의 영화 팬으로서 마음이 착잡했다.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감독의 넋두리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결국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에 나서는 장면에선 아연실색했다. 그의 현재를 있게 한, 불경하면서도 원초적인 에너지가 다시 살아난 듯해 반갑기도 했지만 이젠 대가가 된 그에게서 좀 더 원숙해진 면모를 보고 싶었다.
끊임없이 칭얼거리고, 끝내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꾸 넘어지는 듯한 그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자신의 영화를 몰라보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회가 먼저 손 내밀어주기만을 바라는 이중적이고 모호한 태도도 불만스러웠다.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수상했다지만 '아리랑'은 그렇게 만족보다는 실망이 큰 영화였다.
그의 최신작 '아멘'이 특별상영 형식으로 지난주 극장가를 찾았다. 배우 김예나와 감독 본인이 촬영과 연기를 모두 겸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불안하게 떨리는 카메라 등 기술적인 이유로 마치 학생들의 습작을 보는 듯한 화면은 조악하지만 영화에 대한 감독의 무한한 순정이 느껴졌다. 영화에서 여자를 겁탈하고 그 여자 주변을 배회하는, 방독면 쓴 정체불명의 남자는 글로써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나를 위해 아이를 낳아주세요. 저는 경찰에 자수하고 벌을 받겠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용서를 해달라고, 그리고 나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감독의 간절한 기도로 다가왔다.
칸에서 '아리랑' 상영회 다음 날, 어느 한식당 앞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기자들이 있다는 이유로 저녁 약속이 있는 그 식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멀리 한국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해서 그렇다"는 게 한 감독이 전한 그의 마음이었다. 그 미안함은 그의 팬들을 향한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와 팬에 대한 절절한 애정으로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예전의 활력을 찾았으면 좋겠다. '쫄지마'라는 유행어도 있지 않은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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