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권 실적은 올해 유례없는 풍년이었다. 현대건설 매각 같은 특수요인도 있긴 했지만 20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순익이 예상된다. 그런데도 은행장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올해보다 많이 어려운 내년이 기다리고 있는 데다, 월가에서 시작된 '탐욕' 논란이 내년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1일 한국일보가 시중은행장 8명(단 씨티은행은 은행장 대신 실무 임원이 답변)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여실히 확인된다. 은행장들은 대부분"올해보다 훨씬 보수적인 경영을 할 것"이라고 답했다.
"내년 순익 급감, 공격에서 내실로"
내년은 여러모로 올해보다 힘든 한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올해와 비교한 내년 영업환경을 묻는 질문에 은행장 8명 모두 한 목소리로 "다소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유럽 재정위기다. 내년 경영 애로사항 3가지를 꼽아달라는 주문에 8명 전원 유럽 재정위기를 택했고, 이어 7명이 가계부채 문제를 지적했다. 유럽 재정위기는 단시일 내 해결되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였다. 외국인인 래리 클레인 외환은행장(1년)과 리차드 힐 SC제일은행장(6개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은행장들은 모두 유럽 재정위기 해결에 2~3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올해의 호황이 내년에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게 은행장들의 판단이다. 국민ㆍ우리ㆍ신한ㆍ하나 등 '빅4'은행장들은 모두 내년 은행 순익이 올해의 80~100%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응답했고, 조준희 기업은행장과 래리 클레인 외환은행장은 이보다 더 어두운 전망(올해의 50~80% 수준)을 내놓았다.
내년 경영 기조는 올해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바뀔 전망이다. 올해와 내년의 경영 기조를 내실 영업(0)과 공격 영업(10) 사이의 수치로 표시해달라는 주문에 대부분 은행장들이 내년 수치를 대폭 낮춰 잡았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내실 영업에 더 무게를 두겠다는 얘기다. 특히 민병덕 국민은행장은 올해 다소 공격적인 영업(6)에서 내년에는 매우 보수적인 영업(2)을 하겠다고 답했고, 서진원 신한은행장(6 →4), 조준희 기업은행장(5 →4), 래리 클레인 외환은행장(7 →5)도 내년에는 내실 강화에 무게를 두겠다고 밝혔다. 이순우 우리은행장(4 →4)과 김정태 하나은행장(2 →2)은 올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다만, 유럽 재정위기가 6개월 내 해결될 걸로 보는 리차드 힐 SC제일은행장은 올해(5)보다 내년(9)에 훨씬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겠다고 답했다.
"개별 사안은 은행에 맡겨 달라"
올해 하반기 지구촌을 강타한 은행 탐욕 논란에 대한 은행장들의 속내는 어떤 걸까. 에둘러서 은행 수수료와 예대마진이 적정 수준이라고 보는지 여부를 물었다. 8명 중 6명은 '적정하다'고 답했고, 민병덕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하나은행장은 '다소 낮다'고 응답했다. 정치권과 금융당국, 시민단체 등이 제기하는 수수료 인하 및 예대마진 축소 요구가 지나치다고 보는 것이다.
금융당국에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듯 했다. 익명으로 금융당국에 바라는 점을 부탁하자 A행장은 "정치적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서 벗어나 원칙에 입각한 금융정책을 추진해 달라"고 주문했고, B행장은 "개별 사안이나 미시적인 사항들은 가급적 은행에 맡기고 감독기관은 금융산업과 시스템의 적정 여부 위주로 감독해 달라"고 요청했다. C행장은 "가계부채 문제와 선진국 경기 둔화 위험을 고려해 완화적 통화정책 및 확장적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쟁은행을 묻는 질문에 대다수 은행장이 답을 피한 반면, 민병덕 국민은행장과 서진원 신한은행장은 서로를 경쟁자로 지목했다. 민 행장은 "신한은행은 다변화된 이익 구조와 뛰어난 위험관리 능력을 갖췄다"고 했고, 서 행장은 "국민은행은 채널과 고객 기반이 두텁다"고 평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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