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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독립야구단' 고양원더스 김성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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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독립야구단' 고양원더스 김성근 감독

입력
2011.12.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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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69) SK와이번스 전 감독에 대해서는 호오가 크게 갈린다. '야신(야구의 신)'이라는 별명처럼 꼴찌를 일등으로 만드는 최고의 선수조련사라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승리만을 목표로 삼아 야구를 재미없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일본 교토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재일동포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문배달 우유배달로 근근이 야구를 이어갔으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에 홀홀단신 날아와 야구계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 주인공인가 하면 야구팬으로 만난 아내에게 야구장 출입을 금지시킨 것은 당연하다는 지독한 마초이다. 그는 한국사회가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질타하면서도 정작 그 스스로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고 선수들에게 교양을 전달하려고 책을 많이 본다고 했지만 최근에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하지 못했다. 토요일에 인터뷰를 하자고 하고서 연락을 끊더니 우여곡절 끝에 금요일 오후에 연락이 닿자 갑자기 '지금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했다. 30분만 하자던 인터뷰는 두시간 너머 계속됐지만 그를 이해하긴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어떠랴, 그는 말이 아니라 야구로 정상에 오른 사람인 것을. 그는 프로야구 통산 1234승 57무 1036패로 김응룡(70)전 감독의 1436승 65무 1125패를 잇는, 역대전적 2위의 야구감독이며 한국시리즈 우승도 세 차례를 기록해서 역시 김응룡에 이은 최다 우승 감독이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_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SK감독을 그만 두고) 일본에 있다가 2주전쯤 왔어요. 일본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편해요. 이미 다 언론에 소개가 됐지만 독립야구단을 만들겠다는 허민(35•위메이크프라이스 대표)구단주를 만나서 감독을 맡기로 했고요. 프로야구가 31년째 들어서니까 저변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선수층이 두껍지 않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갈만한 길이 별로 없어요. 독립야구단은 프로나 2군으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실력있는 프로선수로 길러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 이 일을 해야 되겠고 일 자체도 보람차 보여서 맡겠다고 했습니다. 구단주의 생각이 그냥 독립야구단을 만든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야구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꿈에서도 나와 일치했어요. 고양원더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하는데 2일부터 전주에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_그냥 독립야구단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군요.

"당연히 이건 그냥 시작이지요. 한국 속에서만 야구를 보면 미래가 없어요. 세계 속에 어떻게 진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미국에서 야구결승전을 월드시리즈라고 하는데 진짜 월드시리즈는 아니잖아요. 궁극에는 아시아 대표가 생겨서 아시아 패자랑 미국 패자가 겨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짜 월드시리즈인데. 독립야구단 자체가 이런 것을 직접 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게 모태가 되어서 한국야구가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을 그리고 있어요."

_쓸만한 선수들이 보이던가요?

"아직 선수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계속 인터뷰만 하고 있습니다. 피곤해요. (그는 입에 구열이 나서 인터뷰 내내 아랫입술을 쓸었다.) 고양원더스에 현재 49명이 있는데 35명으로 추릴 예정입니다. 12일 창단식을 하고 14일쯤 전주로 내려가요. 거기서 29일까지 연습하고 새해 1월 3일부터 다시 연습 시작하고 15일에 일본 시코쿠현 고치로 전지훈련을 떠납니다. 내년 한해 동안 2군 구단과 48개 게임이 예정돼 있습니다. 보통 프로구단이 연중 133게임을 하는 걸 생각하면 실력향상을 위해 시합수가 부족해요. KBO에서 보충해주는 연습게임을 해야겠지요."

_목표는 어느 정도로?

"한 명이라도 프로야구 진출시켜야 하고 팀으로 존재가치를 만들어서 제2 , 제3의 독립리그팀이 나오게 만들어야지요."

_2006년 약체팀인 SK와이번스를 맞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키겠다 공언하고 실제로 우승으로 연결시켰는데 이번에는 몇 명을 프로로 보내겠다 그런 공언은 안하시나요?

"선수를 한 명도 안 본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개인으로 할 때랑 팀으로 할 때는 틀려요. 조직의 힘으로 이기는 것은 어디든 통할 수 있지만 개인의 역량이 프로에 통할 수 있느냐는 굉장히 어려워요."

_조련하는 비결이 있나요?

"사랑을 갖고 미련하게 끝까지 쫓아다니는 것 뿐이지요. 야구는 던지고 받고 치고 하는 게임이니까 하나라도 되면 그걸 보고 계속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될 때도 있고 필 거 같은데 사그라드?선수도 있고."

_감독으로서 가장 중시하는 원칙이 있나요?

"감독은 인내해야 하고 솔직해야 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이랑 똑같아요. 애 키울 때 기다리는 것처럼 그 사람이 제 능력의 최고치를 발휘하도록 기다려야 해요. 부모도 거짓말하면 앞에서만 따르고 뒤에서 손가락질 하잖아요. 자녀양육과 다른 점이 있다면 20년 30년 인내가 아니라 화가 나도 참아야 하는 순간순간의 인내가 중요해요. 자기 감정 속에서 놀고 있으면 상대를 가르칠 수 없잖아요. 이것도 부모하고 똑같아요."

_그런데 선수들이랑 밥도 같이 안 먹고 이동도 따로 한다는데, 부모는 밀착해서 가르치는 존재 아닌가요?(웃음)

"부모따라 틀린 거 아니에요? 밀착해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성격상 밀착해서 가르치질 못해요. 멀리서 거리를 두고 해야 베스트가 되니까 거리를 유지하게 됐어요."

_그렇게 하면 외롭지 않나요?

"톱에 있는 사람은 다 외로운 거예요. 외로운 것을 달래려고 밑으로 내려오면 실격인 거예요. 내려오면 사람한테 타협을 해야 하고 동의도 해야겠고 그래서 평범해지면 끝이에요. 나는 라이벌도 친구도 멘토도 종교도 없어요. 나만 믿어요."

_28세에 굉장히 일찍 지도자로 접어들었는데 달리 보면 선수생활을 빨리 접은 것이네요.

"나는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을 타고나지 못했어요. 일본에서 야구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재미있어서 하는 거였어요. 공터만 있으면 그때 애들은 야구를 했어요. 중1 때 정식으로 시작했지만 고등학교는 학비가 싼 곳을 찾아 가쓰라고등학교를 갔어요. 당시 야구명문고는 선수가 200명 300명이에요. 가쓰라 고교는 선수가 8명, 9명 많아 봐야 15명이었어요. 경기를 하려면 임시로 선수를 빌려왔어요. 고3때인 1959년에 재일교포학생야구단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오게 됐는데 그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때까지 저는 교토의 집과 학교, 10분 거리의 야구장 밖에 몰랐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 신문배달하고 학교 가서 오후 8시, 9시에 집에 왔어요. 우유배달 하면서 하루에 우유를 10병도 마셨어요. 야구를 한다니까 주인도 눈감아줬어요. 덕분에 안 크던 키가 갑자기 커서 180센티가 됐어요. 재일교포학생야구단에 뽑힌 것도 키 덕분인지도 몰라요. 비행기도 당연히 처음이고 밖에서는 뭘 먹는지도 처음 알았어요.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대통령이랑 식사도 하고 곳곳을 다니며 환영도 받았어요. 그때부터 선수로서 기량도 부쩍 늘었어요."

_그래서 여기가 내 조국이구나 생각하게 된 건가요?

"처음에는 그냥 외국 보듯 했지요. 여름이었는데 산이 나무가 하나도 없고 덥고 먼지가 무지 많았어요. 건물에 포탄자국 총알자국이 여전했고 거리가 지저분하고 거지가 굉장히 많았어요. 일본에서 가네바야시 세이콩(金林星根)으로 살다가 여기 저기 다니면서 환영을 받고 이야기도 많이 들으니까 서서히 우리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금은 나 김성근일 뿐 한국사람 일본사람 그런 구분도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그때 다시 교토로 돌아가서 한국인인 걸 밝히고 친구들도 집으로 부르고 한국인인 것을 내세우게 되었어요."

_그래서 차별을 받지는 않았나요?

"프로야구단 입단테스트도 받았지만 좋은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시회에 나와서 취직을 하려니까 어려웠어요. 두 번이나 국적 때문에 합격이 취소됐어요. 중소기업은 합격했지요. 60년부터 동아대 선수를 지내고 사회인야구팀에 활동한 것 등을 계기로 64년 12월 영구귀국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듬해 1월에 한일국교정상화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가족을 완전히 안 본다는 각오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김성근의 야구를 평가해준 곳은 한국이었어요."

_2005년에 롯데마린스 순회코치로 다시 일본야구를 경험하셨지요? 한일 야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고등학교까지만 일본서 활약했으니 정확한 비교는 힘들겠지만 일본은 야구가 즐거워서 하는 것인 반면 우리나라는 야구가 대학가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돈벌기 위해 하는 수단이라는 점은 아쉬워요."

_1982년 오비베어스 코치로 프로에 발을 디딘 후 가장 행복한 일, 가장 후회하는 일은 뭔가요?

"유니폼 입고 있는 순간은 늘 행복해요. 내가 전력투구하고 있는 순간이니까요. 후회하는 것은 없어요. 후회한다는 것은 전력투구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지난 경기는 이렇게 할 걸 그런 후회는 해봤지만."

_임기 중에 잘린 SK와이번스와의 앙금은 푸셨습니까?

"잘린 게 아니라 내가 그만두겠다 한 겁니다. 앙금이 없어요. 앙금을 가질 정도로 소홀하게 일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계약사회인데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는 거지. 이상한 이야기가 많이 돌았지만 내가 SK에 대해서 코멘트 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_이어서 감독이 된 이만수 전 2군수석코치가 제 때 연락하지 않았다며 서운해하던 마음은 풀었나요?

"세상살이 다 그런 거예요."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 바로 그날 밤에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일구대상 수상식에서 이만수 감독을 만나 굳은 얼굴로 악수를 나눴으나 나중에 기자들에게는 "원수 사이도 아니고. 이제 감독 얼굴이 돼있더라"는 덕담을 전한 것으로 보도됐다.)

_언제까지 현역으로 뛰실 생각입니까?

"내게 야구는 밥과 같아요. 살아있는 한 평생 할 겁니다."

_체력이 받쳐주나요?

"체력은 기력이에요.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체력은 생기는 겁니다. 야구를 하겠다면 체력을 만들어가야지요."

_체력을 만드는 비결이 있다면?

"매일 한시간 반이나 두시간씩 길을 걸어요. 이건 빼먹은 적이 없어요."

_김성근 야구는 재미없다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야구의 목적은 승리에요. 승리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 왜 재미없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_그런데 부인은 1000승 기록 때만 야구장을 왔다는데, 왜 야구장에 못 오게 하는 겁니까?

"남편의 직장인데 여자가 들락거리면 되나요? 그럴 시간 있으면 집에서 남편을 위해 다른 일을 더하는 게 낫지."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사진=김주성 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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