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복동 할머니 "또 몇번을 더 해야하나… 정부가 제발 좀…"
"당한 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너무 오래 걸려.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게 후회되기도 해…."
할머니는 지쳐 있었다. 연신 "착잡하다"고 했다. 김복동(86)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초기부터 참여해 온 위안부 피해자다. 지금이야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지만 김 할머니는 20년 전 피해자임에도 곱지 않은 시선을 감수하면서 거리로 나섰다.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이 시위가 14일 1,000회를 맞는다. 사과나 배상 그 어느 것도 받아내지 못해 20년째 계속되는 시위. 이 달갑지 않은 기록에 할머니는 "또 몇 회나 더 이어져야 하냐"며 한숨부터 쉬었다.
혼자 품고 있던 상처
김 할머니는 열네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고향인 부산을 떠날 때까지도 일본군 군복을 만들러 가는 줄 알았다. 태국 싱가포르 등에서 8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 받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혼자 식당을 운영하며 살았다. 그렇게 40여년이 흐른 뒤인 92년에야 정부는 '정신대 피해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도 신고를 했다. 하지만 주위 시선이 이상했다. 할머니는 "이웃 사람들이 '할매 거기 갔다 왔네요' 하는데 내 마음이 서늘하더라"고 했다.
혼자 품고 있던 일이었다. 해방 직후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 앞에서조차 입이 떨어지지 않던 말이었다. 그래도 알리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가 말을 안 하면 영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 92년 2월 26일 7차 수요시위. 피해 할머니들이 처음으로 이 시위에 참가한 이날, 김 할머니도 부산에서 상경했다. 피해자들이 직접 나섰으니 곧 사과를 받을 줄 알았다. 청와대,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다 경찰에 끌려나는 것도 다반사였지만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10년 만에 다시 짐을 싸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위안부 문제는 국회의원이나 국민들의 관심을 받으며 작은 변화를 불러왔지만, 당사자인 일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 편에 서야 할 우리 정부마저도 긴 침묵을 이어갔다. "그 이후 한국말마저 다 잃어버릴 정도로 부산에서 혼자 쓸쓸히 지냈다"는 김 할머니는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는 등 건강이 악화된 지난해 3월 상경, 서울 충정로에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쉼터 '우리집'에서 지내고 있다.
다시 수요집회에도 나가고 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피해자가 나 혼자도 아니고 다른 할머니들도 있으니까 그냥 묻혀 살걸 그랬나 후회도 돼. 너무 오랫동안 안 끝나니까…." 그리고 몇 번이나 기자에게 당부했다. "할머니들이 무슨 힘이 있나. 자꾸 우리한테만 묻지 말고 정부에 가서 말을 좀 해줘. 제발 정부가 나서서 해결을 해주라고, 제발 좀…."
■ 수요 시위, 그 후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91년 김학순(97년 별세) 할머니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하면서다. 이후 정대협이 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위안부 강제 연행 인정과 피해자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첫 수요시위가 됐다. 수요시위가 매주 이어지자 정부는 같은 달 말 당시 외무부에 '정대협 실무대책반'을 만들어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수요시위로 위안부 문제가 대외적으로도 알려지면서 미국 하원은 2007년 일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정대협은 93년 생활안정지원법 제정을 촉구해 생활이 어려운 피해자들에게 임대아파트를 제공하도록 했고, 일본 전범 출입국금지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정대협 관계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수요집회에 시민단체뿐 아니라 청소년 등이 참여해 할머니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수요시위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음 7가지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 규명 ▦일본 국회의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일본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하지만 일본 정부는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청구권 협정 체결로 위안부 배상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10월에도 "지금까지의 방침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못 박았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정부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현재 생존자는 65명뿐이다. 올해에만 14명의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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