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제정 러시아 시절 황제)의 굴욕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날로 거세지면서 절대 권력자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며 10일(현지시간) 이렇게 보도했다. 수도 모스크바를 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푸틴 총리를 정조준하고 있어 세 번째로 대통령 권좌에 오르려 했던 구상에 차질이 예상된다.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10일(현지시간) 시위는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해 전국 60개 도시에서 열렸다. 모스크바에서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해 반정부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경찰 측은 시위대를 3만명으로 추산했지만, 주최 측은 5만~10만명이라고 주장했다. 모스크바에서 수만명이 참가한 시위는 옛 소련 붕괴(1991)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청년층부터 장ㆍ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위대는 '사기꾼과 도둑 권력은 물러나라''도둑 정권을 부정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부를 비난했다. 시위에 참가한 미하일 카시아노프 전 총리는 "분노의 목소리는 도둑 정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측은 경찰과 군인 등 2만여명을 시위 현장에 배치했다. 뉴욕, 런던, 도쿄, 밴쿠버 등 해외 1-개 도시에서도 현지 거주 러시아인들이 재선거와 푸틴 퇴진을 요구하는 동조 시위를 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러시아의 봄'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촉발→정부의 탄압→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 등 전개 과정이 '아랍의 봄'과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현 정권의 지지율이 절반 이하(46%)로 떨어진 점, 고유가 등에 힘입어 호황을 누리던 예전과 달리 경기가 정체된 점, 장기 집권에 따른 염증 등이 정권에 대한 불만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 총리가 곤경에 처한 것은 분명하지만 퇴진을 언급하기는 시기상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군경 조직을 완전 장악한데다 석유안정화기금 및 국가복지펀드 등 반대파의 불만을 잠재울 수단도 갖고 있다. FT는 "러시아 내에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삶의 수준이 유지된다면 어느 정도의 부정 부패는 감내하는 양면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과거 철옹성 같은 권력에 균열이 간 푸틴 총리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편 러시아 선거관리위원회는 9일 여당의 총선 승리를 공식 선언했다. 선관위는 이날 통합러시아당이 49%를 얻어 전체 450개 의석 중 238석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야권은 선관위의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부정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를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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