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새벽, 종로 일대를 걸어 다니며 벽과 버스 정류장에 나치 제복과 삽이 그려진 넥타이차림의 이명박 대통령 그림을 붙인 이가 있었다.(본보 9일자 11면, 10일자 8면 보도) 연말 모임으로 얼큰하게 취한 중년 남성과 청년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림을 본 그들은 크게 웃고 사진을 찍으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시민들이 현 정권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림을 붙이며 피부로 느꼈다."
이 그림을 그리고 붙인 재미 작가 이하(43)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그림을 통해 시민들에게 작은 청량감을 주고 싶었다"며 주위의 만류에도 거리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1997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시사 만화가로 활동하다 뉴욕으로 건너가 순수예술로 전향한 이씨는 최근 서울에 이어 수원에서 '역사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 풍자화도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이다.
"미국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각 나라 대통령을 기괴하게 그리는 작가가 많아요. 여자 대통령을 남자로, 남자 대통령을 여자로 바꾸기도 하는데, 누구도 문제 삼지 않죠. 저 역시 한국 헌법 22조와 유엔인권헌장 19조에 나온 '표현의 자유'를 정당하게 누렸을 뿐입니다. 예술가는 누구보다 발언에 과감해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알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모두 예술가인데, 한국 사회엔 그런 예술가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지난 5월 뉴욕에서 열린 개인전 '귀여운 독재자(pretty dictators)'전에서 그는 빈 라덴, 카다피 등의 독재자를 귀엽게 그려냈다. 조롱의 의미다. 전시를 본 루마니아 중년 여성은 그에게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스체쿠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독재자의 총에 가족을 잃은 그녀는 생면부지의 이씨에게 눈물을 보였다. 독재자는 죽어도 남겨진 자의 슬픔은 씻기지 않았다. "인간관계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상처는 치유할 수 없지요. 그림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계속 이런 그림을 그릴 겁니다."
미국에 사는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했다. 이미 그곳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자본으로 얼마나 빨리 시장을 선점하느냐가 관건인 구조죠. 서민들이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어요. 미국에서는 견인차 운전자와 차 주인 간의 총기 사건이 흔해요. 사금융이 난립한 미국에서 직장을 잃어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견인차를 시켜 차부터 압류하거든요. 땅덩어리 넓은 미국에서 차 없으면 구직 활동도 못해 굶어 죽으란 소리죠. 견인차 운전자는 무조건 가져가려 하고 차 주인은 필사적으로 지키다가 서로 총질을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갇히면 서로 왜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매번 적자가 나는 비효율적인 작가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작품을 만들 때 느끼는 희열 때문에 이렇게 산다"는 그는 작품보다 자신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삽질 공화국'·쥐그림… 정권 비판적 예술들 수난
종로경찰서는 9일 이하 작가를 경범죄로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 정권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미술작품의 수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 광주 5ㆍ18기념문화관에서 열린'江강水월來'전에 나온 설치작품 '삽질 공화국'(김병택 작)은 삽날 모양에 이명박 대통령 얼굴 사진 170여 장을 붙인 것을 문제 삼아 국정원이 철거를 요구해 논란이 되었다.
2010년 서울 22곳에 설치된 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스프레이로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씨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 받기도 했다.
남북 교류의 상징적 장소인 도라산역에 있던 작가 이반의 대형 벽화 '생명사랑, 인간사랑, 자유사랑, 평화사랑'은 "민중미술 계열의 칙칙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2010년 작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철거됐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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