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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남아 있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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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남아 있는 나날

입력
2011.12.1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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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서는 동네 커피전문점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다. 엊그제 그 앞을 지나는데 상호가 적힌 간판에 눈이 멈췄다. '피파 패시스(Pippa Passes)', 19세기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극시 제목이다.

이 시 첫 구절은 '아침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 피파가 1년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 아침 희망에 부풀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계절은 봄이고/ 하루 중 아침/ 아침 일곱 시/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한해 마무리하는 시점

아름다운 시어를 혼자 읊조리며 사무실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내년도 달력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달력이 얇아질 때마다 마음이 공허해지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비관주의자다. 반면 찢어낸 달력의 빈칸에다 자신이 한 일을 적어두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날들을 기쁘게 떠올리는 사람은 낙관주의자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억지로라도 낙관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피파 패시스'의 주제처럼 말이다. 피파는 그 마을에서 가장 행복한 네 사람의 집을 찾아간다. 피파가 동경했던 그들은 부와 권력으로 행복을 누릴 것 같아 보였지만 저마다 두려움과 근심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그들은 피파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찾는다. 피파는 자신이 그들의 영혼을 구한 것도 모른 채 날이 저물자 단 하루뿐인 휴일을 헛되이 보낸 것을 슬퍼하며 잠자리에 든다.

피파처럼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행복을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올해 기록한 일기나 수첩을 꺼내 그날 누구와 만났으며,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틀림없이 무언가 보람있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과거를 우리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것으로, 미래는 우리의 등 뒤쪽에서 다가오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그렇다. 미래는 가능성일 뿐이며, 과거란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덧없는 삶이라고 하지만 덧없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이지, 실체가 분명한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실체도 없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소설 '남아있는 나날'에서 집사로 한평생을 보낸 주인공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낙관론으로 여유 가져야

유럽 재정위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내년까지 이어진다 해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의 메커니즘으로만 해석하려고 한다. 금리를 내리고 통화량을 늘리면 고용이 증가하고 성장률이 높아지며, 금리를 올리고 통화량을 줄이면 물가가 안정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 문제를 기술적 처방 대상으로만 간주한다. 경제 시스템을 그저 하나의 기계로만 볼 뿐,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인간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경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 해결책 역시 우리가 쥐고 있다. 경제위기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일기를 쓸 때마다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다."

박정태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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