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전문가는 아니지만 올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두 편의 한국 애니메이션은 꼭 언급하고 싶다. 작화의 우수성, 기술적 탁월함 등에 대해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작품 그 자체보다 기획 의도 그리고 이 작품들이 거둔 의미 있는 성과들에 주목하고 싶은 거다.
문제의 두 작품은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다. 이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우선 '마당을 나온 암탉'은 대부분의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은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다. 그런 만큼 이야기는 웃음과 감동을 주는 착한 내용이다. 양계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단식도 불사하는, 호기심 많은 암탉(잎싹)의 모험과 자기희생을 통해 '자연의 법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교훈도 넌지시 전해준다.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유명 배우들도 대거 참여했다. 문소리, 유승호, 최민식, 박철민 등이 그들인데 이들의 개성 있는 목소리가 구현하는 캐릭터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한국영화계의 전통적인 제작사라 할 수 있는 ㈜명필름이 제작(오돌또기와 공동제작)을,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을 담당했다. 제작과정과 스크린 확보 측면에서 주류 시스템의 혜택을 본 것이다.
반면에 '돼지의 왕'은 개봉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의 잔혹 스릴러'라는 문구를 앞세워 홍보에 나섰다. 당연히 관람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이고, 내용은 어둡고 참혹하다(그 강도가 얼마나 셌으면 애초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심의반려 조치 됐겠는가). 첫 장면은 목 졸려 죽은 여인의 얼굴과 집안 곳곳에 붙어있는 빨간 차압딱지, 그리고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오열하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이후 영화는 중학교에서 형성된 서열, 즉 공부 잘하고 부자인 학생들(소위 개 혹은 애완견)과, 성적도 별로고 돈도 없는 학생들(소위 돼지) 간의 일방적 관계를 묘사하면서 이 끔찍한 틀을 깨기 위한 몸부림들이 어떤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응시한다. 이런 왜곡된 관계가 성인이 된 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압축하는 마지막 폭력적 반전은 더 쇼킹하다.
또 양익준 감독, 김꽃비, 오정세 등으로 구성된 목소리 연기진도 열연 여부와 상관없이 대중적 인지도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에 현저히 밀린다. 완성하기까지의 과정도 험난해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가 주축이 돼 제작을 주도하고 KT&G 상상마당이 배급을 맡아 20개 안팎의 스크린에서 상영해왔으니 전형적인 독립영화 식의 고단한 여정을 거쳤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두 작품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전혀 다르지만 의미 있는 모범사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두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근심 속에 위험을 무릅쓰고 뚝심 있게 추진된 프로젝트들이다. 특히 이런 시도를 주류 영화계의 대표선수 격인 심재명 대표와 독립영화계의 터줏대감인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앞장서 해냈다는 점이 여운을 남긴다. 이미 '공동경비구역 JSA'등 수많은 화제작을 배출한 심 대표와, 안 그래도 자기 분야에서 할 일이 태산인 조 집행위원장이 굳이 장기도 아닌 애니메이션 제작의 위험부담을 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솔선수범의 의무를 지는 게 순리다. 힘 있는 선배라는 명분으로 양지만 찾아 다니고 단물만 빼먹는다면 그냥 기득권층, 특권층에 다름 아닐 테니 말이다. 다행히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22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수익을 남겼고, 얼마 전 개봉한 '돼지의 왕'은 올해 독립영화 최단기간(14일) 1만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며 선전했다. 앞으로 중견 영화인들의 솔선수범이 더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선엽 수원대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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