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마사유키(56)는 지금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깨어나면 모든 것이 악몽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3월 사상 초유의 쓰나미는 기무라가 살고 있는 이와테(岩手県)현의 작은 마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를 초토화했다. 주민의 10분의 1이 사망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산업의 80%가 붕괴된 고향을 견디지 못해 다른 도시로 떠났다. 기무라 가문이 3대째 운영해온 전통과자집 ‘기무라 제과점’은 돌벽 하나만 남았고 맞은편 집은 진흙밭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여전히 모든 것이 악몽이기를 바란다”
운명의 3월11일, 주문 받은 단팥빵 100개를 만드느라 새벽부터 분주했다. 오후가 되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집으로 달려가 81세 노모에게 외쳤다. “쓰나미가 왔어요!” 가족과 함께 언덕 위의 절로 대피한 그는 80년 동안 숱한 화재와 강진도 견딘 가게가 거대한 파도에 무참히 휩쓸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물이 빠지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조리 비법과 주방 기기도 사라졌다. 물에 쓸려가지 않은 것은 4억여원의 빚뿐이었다.
집도 가게도 모두 잃은 기무라는 자기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이웃들을 도우며마음을 추슬렀다. 아내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동안 그는 일본 전역에서 기부받은 빵을 자동차에 싣고 이재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속에는 마을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애매한 나이였습니다. 10년만 젊었어도 재건에 나섰을 테고 10년만 늙었으면 아예 떠났을 겁니다.”
기무라는 가업이나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편이 아니었다. 명문인 도시샤 대학을 나와 광고업에 종사하기를 원했지만 부모의 간절한 희망으로 고향에 내려와 가업을 잇고 있었다. 1926년 할아버지가 차린 기무라 제과점은 간즈키(달콤하고 쫀득한 풀빵의 일종) 등 향토 과자와 빵을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로 가득한 곳이지만 세상에 나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도시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동창들과 만나는 날에는 ‘시골에 틀어박혀 뭐하고 있는가’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하루 16시간씩 일하고도 겨우 적자를 면하는 가게 일도 힘에 부쳤다.
제과점 재건을 포기하고 남부로 내려가 올리브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하던 기무라 는 이재민 센터에서 만난 고향 할머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기무라 제과점의 단골이던 할머니는 그가 주는 빵을 받으며 말했다. “고맙소, 하지만 나는 기무라 제과점의 빵 맛이 그립구려.”
그는 그 자리에서 올리브 농장을 잊었다. 쓰나미가 지나간 지 2개월만이었다.
다시 부풀은 희망
재건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매장은 물론,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150개의 비법이 담긴 책이 모두 물살에 쓸려갔고, 외우고 있는 것은 30개뿐이었다. 라쿠젠타카타 대로변에 있는 사촌의 땅을 얻은 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출을 받았다. 폐업하는 제과점에서 오븐과 믹서, 테이블 등을 인수했다.
8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쓰나미를 계기로 마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워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유명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게는 최대한 빨리 가게를 열 책임이 있습니다.”
10월 중순, 기무라는 주방을 시범 가동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테이블 앞에 섰다. 가게의 대표상품인 간즈키부터 만들기로 했다. 자신의 기억력과 어머니의 노트에 의존해 재료를 믹서에 넣고 반죽을 만들어 찜기에 넣었다. 이내 부풀어오른 빵을 꺼내 맛을 보았다. 실패였다. “양을 잘못 잰 것 같네요.” 이번에는 베이킹파우더를 적게 넣고 파우더오일을 늘렸다. 또 실패였다. 주방에는 장갑도, 의자도 없었다. 수 차례 실패 끝에 간즈키가 제대로 부풀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이번 건 훌륭하구나.”
해 질 무렵 기무라는 내일 일을 정리했다. “어떤 일을 계획한다고 해서 절대로 그대로 되지는 않아요. 빵을 구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래 걸리죠.”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