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메이드 픽션/박형서 지음/문학동네 발행·292쪽 ·1만2,000원
"나는 이미 몇 개의 이야기를 도둑맞았다. 다들 제목만 대면 '아, 그 소설?'하고 아는 척을 할 만한 작품들인데, 지나가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소설가들이 파렴치하게 갖다 써버린 것이다. 이놈들을 확 고소해버리고 싶지만 내가 행동에 나서는 순간 문단은 난리가 나고 주가가 폭락하고 휴전선엔 긴장이 고조될 것 같아 꾹 참고 있다.'('나는 <부티의 천년> 을 이렇게 쓸 것이다'중) 부티의>
이 뻔뻔한 허풍이 이 소설의 작가를 떠올리면 괜한 허언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머리 속에선 정말 온갖 이야기의 재료들이 이합집산하며 스스로 쑥쑥 커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상상력에 온도가 있다면 이 작가는 아마도 100도를 넘을 듯. 이야기들이 비등점에서 팔팔 끓어 넘치며 어디로 튈지 예측불가다. 2000년 등단 후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내며 '21세기 이야기꾼'의 자질을 보인 박형서씨 얘기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 은 2006년 겨울부터 2010년 겨울까지 쓴 단편 8편을 묶은 책. 꽤 긴 기간의 작업을 모은 만큼 작품 내용은 천차만별이지만 핵심은 재미있고 기발하고 짜릿하다는 것이다. 핸드메이드>
'자정의 픽션'을 살짝 보면 이렇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온 가난한 연인이 수제비를 끓이려고 국물용 멸치를 찾지만 사라지고 없다. 하는 수 없이 빈속으로 잠자리에 누운 그들은 멸치가 사라진 이유를 추리한다. 옆집 아줌마가 훔쳐갔다는 현실적인 추측에서 시작해, 꿈을 먹는 짐승인 '트리오핀'이 꿈을 먹으러 왔다가 냉동실 멸치를 먹어치웠다는 환상적 가설을 거쳐, 천대와 멸시에 모멸감을 느낀 멸치들이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양변기를 통해 탈출했다는 '탈애굽' 풍의 장대한 농담의 서사시로 나아간다. 열혈 지사적 멸치의 연설은 이런 식이다. "국물을 내기 전에 저들은 우리의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다. 머리와 내장이 무엇인가? 지성과 영혼이 담긴 그릇이다. 그 신성한 부위가 살점과 척추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도 기발한데, 특히 이야기의 화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해 의외의 반전을 준다. 한 마을에 잇따르는 원인 모를 죽음을 다룬 단편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는 꿈'에선 주인공이 '너'로 지칭되는데, 그렇다면 화자인 '나'는 누굴까. 죽음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에서 '나'의 정체도 드러난다.
해설을 쓴 시인 겸 평론가 권혁웅씨는 "박형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며 "유머, 순정, SF, 철학, 문화사, 신화, 정신분석, 과학, 패러디, 에세이 등의 모든 담론을 섞고 분류하고 재배치하여 새로운 세기의 하이브리드 소설을 창조했다"고 평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