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5일 불법파업주도 등 혐의로 수배 중이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 위원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이는 당시 17년째 전교조 활동을 해오고 있던 교사 A씨. 이튿날 위원장을 보호하던 민주노총 간부들과 A씨가 참가한 가운데 이 위원장 체포에 따른 대책회의가 열린 그날 밤 A씨는 자신의 집에서 회의에 참가했던 간부 중 한 명인 김모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민주노총 차원의 진상조사와 검찰수사가 진행됐고 민주노총 지도부의 총사퇴, 가해자 김씨의 구속, 정진화 당시 전교조 위원장 제명 결정 등 사건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도덕성을 내세웠던 진보적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의 위상이 일순간에 땅에 떨어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꼭 3년이 흘렀다.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민주노총은 민주노총대로 그 사건은 잊고 싶은 기억이다. 지난해 10월 민주노총은 공식 사과를 담은 '사건 평가보고서'를 내며 사태는 공식적으로 일단락됐지만 생채기는 여전하다.
A씨를 대신해 인터뷰에 응한 지지모임의 유현경씨는 "내년 초 가해자의 석방일이 다가오면서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크게 불안해 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유씨에 따르면 A씨는 현재 학교에는 나가고 있지만 불면증과 소화불량 등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체중도 몰라보게 빠졌었고, 그를 접촉하려는 언론의 등쌀에 이사도 했다. 올 4월부터 심리치료를 시작했지만 차도가 없어 최근 치료를 중단했다. 유씨는 "3년 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며 "이번 방학 때는 다른 생각 말고 '잠을 푹 자라'며 안심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성폭행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후 보여준 민주노총의 안이한 사건처리 방식이나 전교조 간부들의 행태가 A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조직 논리를 앞세워 A씨에게 침묵을 강요한 이른바 2차 가해가 더 폭력적이었다는 것이다. 가령 민주노총은 일부 징계자들에게 '지도부 보위를 위해 온몸을 던져 헌신적으로 보호'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완화했고 전교조의 경우에도 정진화 당시 위원장이 제명 조치를 당하자 일부 조합원들이 구명운동을 벌이는 등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행태가 이어졌다. 결국 A씨는 지난해 전교조를 탈퇴했다.
A씨를 지원하는 모임 관계자들은 내년 초 이 사건에 관한 백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유현경씨는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도덕성에 충격을 준 사건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의 잘못된 관행에 희생된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한 사건으로 기억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성평등미래위원회를 만들고 간부들을 중심으로 양성평등 교육을 강화하는 등 쇄신노력을 하고 있다. 노우정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성폭력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하게 못한 우리의 역량 부족을 겸허하게 반성한다"며 "남성중심 조직문화를 깨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내부에는 성폭력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여기거나 아예 이 문제 자체를 거론하기 꺼리는 분위기도 여전하다는 평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