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정민 지음/문학동네 발행ㆍ592쪽ㆍ2만3800원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 후에 '다산학단'이라고 불리는 제자 그룹을 만들어 냈다. 500권을 헤아리는 그의 저작 중 상당수가 이 제자들과 공동 작업으로 나온 것이다. 핵심 제자들은 20명 남짓. 그 중에서도 다산이 각별히 총애한 제자가 한 사람 있었다. 황상(1788~1870)이다.
1854년 다산의 묘가 있는 두릉(지금 남양주)을 다니러 온 67세의 황상과 이별이 아쉬워 다산의 장남 정학연이 써준 글이 있다. '일속산방(一粟山房)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는 서문'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강진에 귀양 사신 것이 무릇 18년이다. 학업을 청한 자는 수십 명이었다. 혹은 7~8년 만에 돌아가고, 혹은 3~4년 만에 물러났다. 곁에서 과문(科文)과 팔고문(八股文)을 익힌 자가 있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삶을 바꾼 만남> 은 다산의 말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았고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귀경한 뒤에는 딱 한번, 그것도 다산이 75세로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만난 것이 전부이면서도 애틋한 사제의 정을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다산의 학문적인 업적, 제자들과 공동 저술작업에 주목한 책들을 여러 권 낸 정민 한양대 교수가 올해 인터넷에 연재한 글을 모았다. 삶을>
돈독했던 다산과 제자들의 관계가 일그러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과거 급제를 바란 제자들의 "힘 좀 써 달라"는 청탁을 다산이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 들어주지 못한 것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중에 다산은 강진에 두고 온 논밭에서 나오는 수익이라든지 경제적으로 챙겨야 할 것은 꼬박꼬박 챙기는 좀 '얄미운' 스승이었다.
하지만 황상은 달랐고 다산도 황상에 대해서는 달랐다.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나 떠나자 드디어 출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던 제자들과 달리, 황상은 생계 유지를 위해 하던 아전 노릇도 그만두고 산속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 농사 지으며 공부만 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조용한 곳에 숨어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혼인한 뒤 공부에 게을러진 제자에게 각방 쓰라고 꾸짖는 스승, 그토록 각별한 사제였건만 헤어지고 18년 만에 상경해 눈물로 해후하는 제자, 그 제자가 고향에 돌아갈 때 성치 않은 몸으로 벼루와 먹, 부채, 담배며 노잣돈까지 챙겨 주고 며칠 뒤 눈을 감는 다산.
황상과 다산의 편지글을 발로 뛰어 찾아 다닌 저자의 열정과 필력은 이번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 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했다'는 저자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안으로 황상과 다산이 걸어 들어와 버렸다고 말한다.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저자의 말대로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사실(史實) 자체가 '한 편의 대하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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