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전철 안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것저것 생각은 고사하고 얼른 도착해 숨막히는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일 게다. 하지만 의외로 그 좁은 공간에서 넓은 바깥 세상이 보인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문쟁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뭘 보고 있는지에 늘 눈길이 간다. 승객의 절반 정도는 졸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뭔가 열심히 읽거나 본다. 아침 출근길이라면 그들 중 다수는 신문을 읽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꽤 된다. 그런데 전철에서 읽는 신문은 거의 한결같이 역 앞에서 집어 온 무가(無價)지다. 집에서 구독료를 내고 신문을 보면서 전철 안에서는 또 무가지를 보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돈 내고 신문 읽는 사람을 한 달 동안 딱 한 명 봤다. 뉴스는 돈 내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정착해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기자는 뭘 먹고 살라고.
전철 안은 다중이 모인 공적인 공간이면서, 잠을 청하거나 신문 보고 책 읽는 개개인의 영역이 확립된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 사생활을 무참하게 침해하는 행동이 있다. 대표적인 게 거리낌 없는 휴대폰 통화 소리다. 10년도 더 전 이야긴가 보다. 한 노인이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끄럽게 통화하는 여대생을 야단쳤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기사가 났다. 그 여대생이 어디 체육대학에서 태권도를 전공했다던가. 그런데 요즘 전철 안에서 시끄럽게 휴대폰 통화하는 사람의 다수는 장년, 노년 어르신들이다. 퇴근길 전철에서는 이어폰도 끼지 않은 채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뉴스 시청하는 분도 가끔 만난다. 젊은이들 버릇 없다고 탓한 성인군자가 한둘 아니지만 이런 무례는 어째 나이 탓은 아닌 것 같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정보통신기술 발전지수 세계 1위 국가다. 그 속도가 하도 빨라 공중예절이 못 따라가도 한참 못 따라가고 있다.
언제 봐도 흥미로운 건 전철 좌석 차지하기 경쟁이다. 차량 1대에 보통 노약자석은 좌우 끝 6개씩 모두 12자리. 출근 때고 퇴근 때고 그 자리는 늘 어르신으로 만석이다. 문제는 어르신이 많아 그 자리가 모자란다는 점이다. 팔팔한 20, 30대가 줄지어 앉아 있는 옆 좌석으로 옮겨 서면 금세 젊은이들이 양보할 것 같은데도, 어째 아무도 그리 가지 않는다. 그래서 노약자석에서는 60대가 70대에, 70대가 80대에 자리를 양보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다. 노약자석은 '노약자들은 여기에만 앉으라'는 자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마침 "노약자석에 젊은이들은 앉지 말고 자리를 비워두라"는 안내 방송까지 나온다. 일본이 매뉴얼에 매몰된 사회라고 비웃을 일도 아니다.
매일 출근길 전철 안에서 신문 주우려고 열심히 오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어떤 할머니는 손이 닿지 않는 좌석 머리 위 선반의 신문을 집으려고 조리용 집게까지 활용한다. 아침 한때지만 가뜩이나 좁은 전철 안을 그렇게 땀 흘려 왔다 갔다 하며 주워 고물상에 팔아 봐야 몇 천 원 돈이다. 국민연금은 아예 해당 없고 매달 10만원도 안 되는 기초노령연금 받아선 딱 굶어 죽기 좋아 나선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다. 노인자살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65세 이상 소득불평등 OECD 3위 같은 통계를 안 봐도 한국의 노인 복지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전철에서 환히 보인다.
김범수 문화부 차장대우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