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사후피임약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미 보건부가 이례적으로 식품의약품안전국(FDA)의 결정을 뒤집고 사후피임약의 판매연령 제한 규정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8일 "내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 유권자를 염두에 둔 결정이 낙태에 관한 해묵은 싸움을 촉발시켰다"고 보도했다.
캐슬린 시벨리우스 미 보건장관은 7일 "17세 미만 여성에게도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 플랜B 원-스텝의 판매를 허용하려던 방침을 철회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FDA의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어린 여성들이 약물의 성격을 충분히 인지하고 사용하기에는 과학적 자료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며 "11세 소녀도 10명 중 1명은 임신이 가능한 점을 고려할 때 좀 더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건부가 FDA의 결정을 번복한 것은 처음이다.
플랜B는 성관계 후 3일(72시간) 내에 복용하면 임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약물. FDA는 다국적제약사 테바가 플랜B의 판매연령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플랜B를 나이에 상관 없이 누구나 살 수 있는 비상 피임약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의료계에서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청소년의 약물 오남용 등 안전 문제를 이유로 판매 확대를 불허한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지금도 미국 내 신생아의 40%가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고, 매년 120만건의 낙태시술이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사후피임약이 '원치않은 임신'을 막는 예방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사후피임약을 '합법적 낙태약'으로 규정한 보수층을 의식해 내년 대선에서 논란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미 기업연구소(AEI)의 노먼 오른스타인 상임연구원은 "건강에 훨씬 치명적인 아세트아미노펜(해열제의 일종)도 연령제한 규정이 없다"며 "버락 오바마 정부가 가톨릭 사제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후피임약 판매는 미국 정가에서 여성보건의 관점을 떠나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다. 낙태에 부정적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2006년 18세 이상 여성에 한해 처방전 없이 플랜B의 판매를 허용했고, 오바마 정부는 2009년 판매제한 연령을 18세에서 17세로 낮췄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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