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최초의 비밀번호는 가게를 하던 어머니가 사용하던 책상용 작은 금고 번호였다. 그 금고에는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다이얼식 열쇠가 부착되어 있었다. 다이얼식 열쇠는 주로 크고 작은 금고에 다이얼이 붙어 있는 열쇠인데 비밀번호를 알아야 열 수 있었다.
요즘 단답식의 비밀번호와는 달리 좌로 몇 번 우로 몇 번 등 여러 개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어머니를 대신해 비밀번호에 맞춰 다이얼을 이리저리 열심히 돌렸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비밀번호가 비밀보다 많은 세상이 되었다. 비밀번호가 맞지 않으면 어떤 문이든 열리지 않는 비밀번호 천국이 되었다.
통장, 카드, 이메일 등 내가 사용하는 비밀번호만도 열 개가 훨씬 넘는다. 외우기도 힘들 정도다. 내게 제일 힘든 비밀번호는 대학 이메일에 사용하는 비밀번호다. 제시하는 까다로운 조건에 비밀번호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운 데, 3개월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변경해야 한다.
한동안은 비밀번호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비밀번호를 나만의 주술로 바꾸었다. 장학금이 필요한 학생의 이름에는 7777을, 성적이 올라야 하는 학생의 이름에는 AAAA를 넣어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자연히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행복한 주술을 걸고 있다. 하루도 몇 번씩, 3개월씩 주술을 걸어주고 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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