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가) 대기업의 수수료 인하요구를 받아들인 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고 신중치 못한 처사다."(1일) "(금융회사들이) 비 올 때 우산 뺏는 격으로 외면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5일)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금융회사들을 질타하고 있다. 금융당국 수장의 구두 개입 자체를 탓할 수는 없으나 최근 이어지는 발언들은 거칠다 못해 도를 넘었다. 정교한 분석이나 적절한 해법은커녕 시중에 떠도는 얘기를 주워담아 맞장구 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카드사들의 현대자동차 수수료 인하 관련 발언만 해도 그렇다. "경제적 약자의 박탈감" "수수료 인하의 우선 순위는 경제적 약자" "다른 대기업 요구엔 어쩔 텐가" 등의 표현으로 카드사를 압박하더니 결론은 허무하게도 "수수료 문제는 사적계약의 영역으로 감독당국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다른 가맹점보다 결제금액 규모가 커 적정 이익이 보장되는 선에서 (현대자동차 수수료를) 인하해줬는데, 그로 인해 서민혜택이 줄었다고 비판하는 건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감독당국 수장의 입에서 나올 얘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카드사만 서민을 챙겨야 하느냐" "포퓰리즘에 기댄 인기영합주의 발언"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쏟아지는 구두 압박에 피로가 쌓이다 보니 영(令)이 제대로 설리 없다. 시중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창구지도도 안 먹히고, 책상머리 대책 외엔 뾰족한 수를 찾지도 못하니 허공으로 흩어질 일시적인 말로 업계를 매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하도 말이 많아서 이젠 무섭지도 않고 안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이처럼 규정과 감독권한을 사용해 조용하게 해결 가능한 문제들을 떠들썩하게 드러내면 시장 혼란이 가중되고, 금융회사는 오히려 면역이 생겨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권 원장의 "비 올 때 우산 뺏는 격"이란 발언이 '금융권 맹공'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매체에 보도되자 금감원 홍보담당자들이 뒤늦게 "소비자와의 상생을 강조한 게 와전됐다"며 해당 언론사들에게 기사를 고쳐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뱉은 말을 주워담은 꼴이다. 그러나 다음날 몇몇 매체에는 권 원장의 진의는 무시한 채(?) '금융권 질타'라는 제목이 그대로 뽑혔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10월 간부회의에서 새마을금고를 언급했다가 시장불안을 부추겨 대규모 인출 소동으로 번지게 했다. 당시에도 "발언취지가 잘못 전달됐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수장은 평소 사자성어로 빗대 현상을 설명하길 좋아한다. 불가(佛家)에선 개구즉착(開口卽錯ㆍ입을 열자마자 진의는 어긋난다)이라고 한다. "금융감독당국은 행동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말을 할 때는 구두개입의 효과 극대화를 위해 신중해야 한다"(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조언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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