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월 중동의 유명 조선ㆍ해운업체인 'UASC(United Arab Shipping Company)'의 쿠웨이트 본사. 이 회사가 발주한 컨테이너 4척에 대한 본 입찰엔 단 2개사만 참여했다. 예비 입찰에서 수많은 조선사들이 탈락하고 한국의 현대중공업, 그리고 일본의 IHI사가 경쟁하게 된 것이다.
UASC 사장이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탓에 현대중공업의 낙찰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바꾼 건 UASC의 기술수석책임자로 현대중공업에 파견 나왔던 윌리엄 존 던컨(작고)씨 였다. 그는 IHI의 입찰금액에 대한 정보를 입수, 종이 냅킨에 적어 현대중공업 측에 전달했다. 뿐만 아니라 UASC이사들에게 "이제 갓 시작한 한국 조선공업을 도와줘야 한다"며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 덕에 현대중공업은 최종 낙찰자로 선정되는 대역전극을 이뤄냈고, 이 수주는 현대중공업의 국제적 지명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정부는 12일 열리는 제48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우리나라의 무역 1조달러 달성에 기여한 31명의 특별유공자를 포상한다. 그런데 이 유공자 명단엔 스코틀랜드 출신의 고 던컨 씨(금탑산업훈장)를 비롯해, 일본의 신일본제철 감사역을 지낸 고 아리가 토시히코씨(동탑산업훈장), 이탈리아 출신의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73ㆍ철탑산업훈장)씨 등 3명의 외국인들이 포함됐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주력 수출산업인 조선 제철 자동차분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줬던 고마운 외국인들"이라며 "무역 1조달러 금자탑 달성의 숨은 공로자였던 이 분들에게 정부차원에서 감사의 표시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 던컨 씨는 1970년대 조선산업의 선각자로 꼽힌다. 수주에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도면 설계부터 선박건조 기술까지 지도를 아끼지 않았고 한국의 조선산업경쟁력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지경부 관계자는 "1981년 사망 이후론 소식이 끊어졌다. 가족들이라도 찾기 위해 지역신문에 그를 찾는 광고와 기사까지 게재했고 결국 어렵게 그의 아들을 찾게 됐다, 이번 시상식에 그의 아들인 앤드류 던컨씨가 참석하게 됐다"고 전했다.
아리가 토시히코 신일본제철 감사역은 포항제철(포스코)에 선진기술을 처음으로 전파해준 인물이다. 포스코는 1967년 출범은 했지만, 대부분 임직원들은 제철소는커녕 용광로조차 본적이 없었다. 이때 일본견학과 연수를 연결해준 이가 바로 아리가씨였다.
그는 애초 포항제철소 건설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의 열정을 접한 뒤론 지형 지질 수리 기상 모든 상세데이터까지 직접 조사하면서 제철소 건설을 앞장서 지원했다. 그는 고로 1기를 건설하는 3년간 포항에 주재했는데, 워낙 열성적으로 도와주자 신일본제철 본사에서 "너무 기술을 전해주는 것 아니냐"며 질책했을 정도였다. 그는 은퇴 후에도 한일문화협회 회장직을 맡아 양국간 우호증진에 헌신하다, 2007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르제토 주지아로씨는 자동차업계에선 '전설적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인물. 우리나라의 첫 고유모델인 현대자동차 '포니'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1974년 '포니 정'으로 유명한 고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은 주지아로씨에게 디자인을 맡겼고, 귀엽고 스포티한 디자인의 포니가 탄생하게 됐다. 현대차 관계자는 "포니는 우리나라 자동차역사의 상징성을 가진 차"라며 "이를 디자인한 주지아로씨의 공로도 그만큼 크다"고 말했다.
주지아로씨는 이후 마티즈, 렉스턴, 소나타, 매그너스, 그리고 최근엔 코란도C까지 수많은 자동차를 만지면서, 한국 자동차의 디자인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명의 외국인 특별공로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7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이탈디자인 주지아로) 대표로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유인호 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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