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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럽영화 '르 아브르', 선의가 빚어낸 작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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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럽영화 '르 아브르', 선의가 빚어낸 작은 기적

입력
2011.12.0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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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가난하다. 구두닦이가 직업이지만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기만 하다. 푼돈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오면 초라한 저녁식사가 그를 기다린다. 아내는 "이미 밥을 먹었다"며 손을 내젓지만 그녀의 배 속에선 천둥이 친다.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집안엔 삭풍이 맴돈다.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그렇게 빈궁한 인생 막바지를 보내고 있는 마르셀은 그러나 삶을 긍정한다. 아내 아를레티의 사랑이 있고, 정으로 다져진 이웃들의 친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마르셀은 출근 길에 아프리카에서 온 불법이민 소년 이드리사와 맞닥뜨리게 되고, 그가 경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챈 마을의 경감 모네는 조금씩 마르셀의 주변을 압박해 들어오는데 마르셀의 아내는 병으로 쓰러진다. 마르셀은 이드리사와 아내를 동시에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예상치 못했던 삶의 기적과 마주하게 된다.

잔잔하게 물결치다 가슴 속에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영화이다. 대수롭지 않은 듯 유럽이 처한 불법이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그 해결책을 능청스레 제시하는 영화다. 별 볼일 없는 삶을 살면서도 남을 위해 행동하는 마르셀의 모습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이드리사를 구하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하나씩 내미는 장면들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엄격한 법치보다는 인류애가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영화는 순박한 어조로 주장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성냥공장 소녀'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핀란드의 괴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이다. 블랙코미디를 무기로 삶의 본질을 간파하곤 했던 이 감독은 좀 더 부드럽고, 희망에 찬(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한) 시각으로 삶을 예찬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천연덕스러운 장면 연출은 변함 없다. 마르셀은 이드리사의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면서 이드리사의 작은 할아버지를 자처한다. "피부색이 하얗다"며 간수가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자 마르셀은 되레 호통 섞인 답변을 한다. "백색증(피부가 하얘지는 선천성 유전질환)인데 장애인 차별적 발언을 한다."

항구도시의 서정적 풍경을 품은 스크린과 따스한 사연들이 오랜 여운을 남기는 동화 같은 수작이다. 핀란드 프랑스 독일 합작. 8일 개봉, 전체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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