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태풍에 휘말렸다. 어제 남경필ㆍ원희룡ㆍ유승민 최고위원의 동반 사퇴로 지도체제는 사실상 무너졌고, 홍준표 대표의 사퇴 및 당 쇄신과 관련한 연착륙, 경착륙 문제만 남았다. 물러난 세 최고위원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은 홍 대표 등도 눈앞에 닥친 양자택일에 심각하고 진지한 자세다. 말만의 논란에 몸을 던진 행동이 덧붙었으니 버티는 쪽도 결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진지한 태도도 당사자나 그 주변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며 살피면 이내 실없다. 원 최고위원은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노후건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홍 대표 측은 "목전의 현안을 처리하고 중지를 모아 중도와 보수를 아우르는 재창당 수준의 리모델링"을 내세웠다. 한나라당을 아파트라고 치자면, 낡은 지금 아파트에 더는 살 수 없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재건축이냐 리모델링이냐로 다투고 있는 꼴이다.
새 아파트 짓기 방법론 다툼
이 정도의 위기 의식은 객관적 위기 내용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위기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대응책은 무의미하다. 한나라당의 위기는 멀쩡하던 아파트가 갑자기 낡은 느낌을 주어서 시작된 게 아니다.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라는 안전진단 결과가 나오기에 앞서 한나라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오랫동안 쌓여왔다. 그 불만이 낡은 아파트 때문이라면 재건축이든, 리모델링이든 새 아파트를 지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낡은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라는 주거형태 자체에 의문을 느낀다면 새 아파트를 지어도 소용없다. 현재의 위험이 한나라당 건너편에 있는 민주당 아파트에도 똑같이 밀려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리 달리 뜯어보려고 해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이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정치적 인기는 '새 아파트'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 등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 늘어났다가 일시에 폭발한 듯한 상황이다. 박 시장은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 이후에도 끝내 민주당 간판을 거부, 예상을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안 원장이 내년 대통령 선거 출마 여지를 남기고도 신당 카드는 일찌감치 팽개쳐버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정당의 간판을 달지 않고서는 정치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던 것과는 180도 다른 급격한 변화다. 다만 이웃나라 일본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진행돼 온 '무당파 정치'의 성공에 비추면, 표면화 양상이 한국사회 특유의 폭발력을 동반했지만, 변화의 속살은 꾸준히 쌓여왔다고 할 만하다.
여러 차례 정권을 주고받은 여야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감은 오랫동안 정당의 내재적 변화를 기다리다 지친 피로 증세이자 변화 가능성에 대한 포기다. 아울러 일반 유권자의 거부감을 희석할 정당 하부조직이 빈약해 부정적 효과가 증폭되기도 했다. 기초에서 중앙에 이르기까지 이미 정치판에 나섰거나 나서려는 사람들을 빼고는 여야 모두 '진성 당원'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지역조직 명단에 지금도 '016''011' 휴대전화 국번이 수두룩하듯, 정당의 하부조직 관리 의지가 박약하다.
더욱이 당원이 되면 고무라기라도 챙길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사회 민주화에 따라 지금은 하급 당원에 돌아가는 실익이 거의 없다. 당원 명부에 이름이 오르고도 선거 때는 다른 정당 후보에 표를 던지는 당원까지 적지 않다니 정당정치 기반의 황폐화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주거형태 선호에 뚜렷한 변화
가열찬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이런 근본 문제를 풀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근본 문제의 작용은 후보의 지역 밀착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총선보다는 대선에서 두드러진다. 내년 총선을 우선 겨냥하면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통령 선거까지 고려에 넣는다면 현재 거론되는 표면적 쇄신은 부작용만 키울 수도 있다. 이래저래 박근혜 전 대표의 계산이 복잡해질 모양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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