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듯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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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인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윤리적 사건이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고통을 주는 얼굴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런 보호막도, 기득권도 없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 던지는 호소에 우리는 상처받고 박해당한다고 합니다. 레비나스를 읽으며 '그렇다고 박해라고 할 것까지야…' 속으로 중얼거렸는데요. 시인의 독백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뒤틀린 몸으로 아이를 업고 있던 여인의 얼굴이 시인을 내내 핍박하고 괴롭힌 것이 맞습니다. 기만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의 형편을 헤아리는 일, 그나마 최악이 아닌 것을 안도하는 일. 그런 안도 말고는 해줄 게 없는 자신을 뼛속까지 서늘하게 느끼는 일. 그런 순정함이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남아 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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