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세계와 사람/ 베두인, 불도저 앞세운 이스라엘 맞서 처절한 '삶터 전쟁'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세계와 사람/ 베두인, 불도저 앞세운 이스라엘 맞서 처절한 '삶터 전쟁'

입력
2011.12.02 17:30
0 0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 남쪽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알 아라키브. 지도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톳빛 사막으로 표시되는 이 곳은 300여명의 아랍계 유목민 베두인족이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노리는 거대한 골리앗과 승산 없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전장이다.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는 베두인족. 불도저를 앞세워 이들을 사막 밖으로 몰아내려는 골리앗은 다윗의 후예인 이스라엘 정부다.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 네게브 사막 남쪽의 베두인족 마을을 없애고 이 지역에 수도와 전기시설을 갖춘 대규모 정착촌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베두인족들이 법적으론 이스라엘 국민이지만, 이들의 거주지가 관청에 등록되지 않은 불법 건축물이기 때문에 강제 퇴거시키겠다는 것이다. 베두인족이 이 곳을 비워주면 다른 곳에 정착할 기회를 주겠다는 조건이다. 철거 예정지의 면적은 243㎢. 이스라엘 전체 베두인족(20만명)의 15%인 3만여명이 수천년간 조상 대대로 살아 온 땅에서 강제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 계획을 "베두인족의 생활을 개선시킬 역사적인 조치"라고 치켜세웠지만, 베두인족에게 이스라엘 정부의 소개령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우기에는 사막으로, 건기에는 오아시스로 이동하며 유랑하는 베두인족은 낙타를 키우며 유제품을 만드는 무리를 최상위 계급으로 치는 종족이다. 한 지역에 머무르며 농경을 하는 이들은 베두인족 중에서 가장 계급이 낮다. 그래서 정착생활을 요구하는 건 베두인족의 자존과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사막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 온 베두인족에게 국가(정부)는 쓸데없는 기구에 다름 아니고 국경은 의미 없는 선일 뿐이다. 하지만 불과 수십년 전 국경을 긋고 이 곳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이교도 정부의 완력에 밀려 수천 년 이어져 온 전통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스라엘이 알 아라키브 베두인족을 몰아내려는 진짜 이유는 네타냐후 총리가 밝힌 '생활환경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가 알 아라키브를 노리는 것은 이 곳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양대 거주지인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독립국가 건설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알 아라키브와 인근 지역이 계속 아랍계 베두인족의 활동 지역으로 남을 경우 향후 팔레스타인이 가자지구-알 아라키브-서안지구를 잇는 지역을 독립국가 영토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이스라엘 정부의 우려다. 이스라엘 정부는 베두인족이 떠난 자리에 군 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오래 전부터 이 곳 베두인족을 눈엣가시로 여겨 온 이스라엘 정부는 지난해 7월 1,300여명의 경찰관을 투입해 마을 철거작전을 시작했다. 이후 경찰이 불도저로 밀고 들어오면 베두인족이 맨손으로 맞서고, 정부가 거주지를 부수면 다시 천막을 세우기를 20여 차례. 2월에는 기어이 베두인족과 담당 공무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칸 알 아마르 마을에서는 이스라엘 정부가 자동차 타이어에 진흙을 발라 만든 초등학교를 철거해 베두인족 어린이들이 배움터를 잃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땅을 비워주면 금전적 보상을 해 주겠다는 입장이지만 알 아라키브 사람들의 반대는 완강하다. 주민 아부 마디암은 로이터 통신 기자에게 "절대 이 곳을 떠날 생각이 없으며 죽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태가 장기화하자 베두인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훼손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 인권문제를 다루는 유엔 특사 리처드 포크는 지난달 29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국제연대의 날'을 맞아 이스라엘 정부의 베두인족 추방 정책을 언급하며 "베두인족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급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베두인족을 사막에서 몰아내고 정착촌을 제공했던 과거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 정부의 철거 조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70년대 네게브 사막 베두인족을 수용하기 위해 7개 마을을 세웠는데, 그 중 인구 5만 3,000명으로 가장 규모가 큰 라하트는 실업률이 37%에 달하고 주민 절반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활하는 빈민 도시가 돼 버렸다.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족을 삶의 근거지인 사막에서 몰아낸 뒤 그들이 먹고 살 수단을 전혀 제공하지 않은 결과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