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은 여느 법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근심 어린 피고인의 가족과 친지, 변호사만 가득했던 어두운 법정 분위기와 달리 원색의 화사한 옷을 입은 미모의 여성들이 다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괜찮을까"라며 소곤거리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법정 입구에서는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을 한 여성들과 얼핏 봐도 '어깨'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건장한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북창동식' 유흥업소의 원조로 유명한 '룸살롱 황제' 이경백(39)씨의 선고 공판 풍경이다.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를 느낀 때문인지 재판 시 주의사항을 외치는 법정 경위의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더 높았다. 몇 분 뒤 긴 머리에 푸른색 수의를 입은 이씨는 걸어 들어오며 방청석에 앉은 미모의 여성들, 건장한 남성들과 잠시 살가운 눈인사를 나누고는 피고인석에 섰다.
지불한 돈에 따라 일정 시간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른 뒤 성관계까지 하는 북창동식 유흥주점으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운영한 업소만 13개에 5년간 매출이 3,6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잘 나갔던 이 '룸싸롱 황제'도 이날 법정에서 떨군 고개를 감히 들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1997년 서울 북창동의 '삐끼'로부터 시작해 황제로 올라서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지도 모르겠다.
단속망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용의주도하게 밤 일을 해오던 그도 국세청 세무조사를 계기로 급전직하의 길을 걷게 된다. 거액의 세금을 포탈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검찰은 국세청 조사를 근거로 수사를 착수, 미성년자를 고용해 룸살롱 내에서 유사 성행위를 하도록 하고, 42억6,000만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7월 이씨를 구속기소했다. 이 바람에 이씨와 자주 연락했던 6명이 파면 해임됐고, 33명이 감봉조치를 받기도 하는 등 경찰에도 큰 불똥이 튀기도 했다.
물론 밤의 황제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구속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밤 일을 통해 긁어 모은 엄청난 돈으로 전직 법원장 출신의 변호사를 고용한 덕분이다. 당시 이씨는 "포탈세액을 납부하기 위해 석방해달라"는 이유를 내세웠고 재판부는 피해 회복도 중요하다고 판단, 이를 받아 들였다. 거액의 세금을 포탈한 성매매 사범을 풀어 주는 전례는 드물다는 점에서 보석 배경에 전관예우가 깔려있는 게 아니냐는 뒷말이 무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씨는 지난해 12월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지 않고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보석논란은 더욱 커졌다. 재판부는 즉시 보석보증금 1억5,000만원을 몰수하고, 지명수배 및 출국금지 조치했지만, 이미 이씨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8개월 만인 지난 7월 붙잡힌 이씨의 도피행각은 대담무쌍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서울 청담동의 모 음식점에서 보리밥을 먹다 체포된 이씨는 지명수배 중에도 바지사장을 내세워 강남 및 북창동 일대에서 룸살롱을 운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도피처도 자신이 운영하던 유흥주점 마담의 집이었다.
이날 재판부도 그의 보석 후 도주행각이 괘씸했는지 '보석 후 왜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냐'고 꾸짖기도 했지만 이씨는 "돈을 벌거나 지인에게 빌려 포탈세금을 갚으려고 하다가…"라는 변명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재판부는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3년6월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법정까지 응원을 나온 그의 선남선녀들로 미뤄볼 때 이씨는 언제라도 다시 밤의 황제로 복귀할 준비가 돼 있는 듯 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