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늘 붉은 색 냄비와 함께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구세군들이다. 붉은 삼각 냄비걸이와 냄비형태의 모금통, 군인 제복을 입은 구세군 사관이 흔드는 종소리는 성탄절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성스런 울림이자, 도시 세모(歲暮)의 익숙한 거리 풍경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한국 구세군의 박만희(64) 사령관을 충정로 구세군빌딩에서 만났다.
-연말이라 바쁘지 않나.
"모두가 다 바쁜 거 아닌가. 외부에 비쳐지기는 12월만 구세군이 바쁜 것 같지만 실제로는 1년 365일 똑같이 바쁘다."
-구세군이 된 계기는.
"원래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68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친구를 따라서 청주에 있는 구세군에 가봤다. 장로교와 다른 점이 많았다. 처음에 구세군에 매력을 느낀 것은 부부가 같이 일한다는 것, 똑 같은 유니폼 과 성직을 받고 평생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었다. 장로교는 항상 남자만 목사다. 부인은 사목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구세군은 부부가 똑같이 사관으로 평생 살아간다. 그 외에도 많다. 구세군은 국제적인 단체로서 세계 어디를 가든 똑 같은 유니폼과 똑 같은 조직속에서 활동한다. 남녀가 평등하다. 다른 교단은 아직도 여자에게 목사안수를 하지 않는 곳이 많다. 구세군은 시작할 때부터 남녀가 동등하게 사관으로 사역하게 한다. 대개 다른 교회는 교회중심의 선교활동을 하는데 구세군은 정말 다양하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슬로건을 걸고 세계 124개국에 있는 구세군이 모두가 교회와 복지시설, 학교, 병원, 지역의 이슈 등에 참여한다. 그늘 진 곳에 사는 이웃에게 관심을 주고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에 마음에 끌렸다."
-요즘 교세는 어떤가.
"물론 구세군도 조직이다. 한국에는 사관이 800명, 직원 1,100명 등 2,000명 가까이가 구세군에서 전문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 복지시설 학교 기관 등등 사업처가 640여개가 있다. 구세군은 군인이라 병사입대를 한다고 한다. 다른 곳은 영세, 세례라고 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신도는 12만명 정도가 있다. 그러나 구세군은 등록된 교인과 신자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군을 좋아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참 많다. 다른 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세군이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자원봉사자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구세군이 매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도 구세군인가.
"물론 아내는 나와 함께 구세군 사관이다. 한국구세군여성사업총재로서 여성사업에 대한 총책임을 맡고 있다. 3남매중 큰 딸은 뉴욕에서 구세군사관이 되어서 한국으로 들어와 교회를 맡고 있다. 아들 내외도 올 봄에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경산에서 교회를 맡아 사역을 하고 있다. 막내는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
-구세군과 자선냄비의 유래를 말해달라.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시작된 것은 1891년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다. 조셉 맥피라는 사관이 선구자다. 성탄절이 임박해서 해안을 지나가던 배가 난파를 당했다. 조셉 사관이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집에 있던 솥을 가져와 '이 솥을 끓게 해달라'고 외친 것이 자선냄비의 시작이다. 전세계 109개 나라에서 하고 있다. 한국에는 1928년에 선교사들이 와서 명동을 나가 보니 땅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넝마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까를 고민하다 12월15일에 명동에 냄비를 걸은 것이 시발이 됐다. 그 해 848환을 모금해 죽을 쒀서 노숙인들에게 나눠줬다. 노숙인들은 IMF때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많았다. 구세군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6ㆍ25 전쟁때도 노숙자들이 많았다. 이때도 구세군은 외국에서 원조를 받은 강냉이 가루로 죽을 쒀서 구호활동을 했다."
-노숙인들을 위한 활동은.
"전국 30곳에 '다일사'(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의 시설을 설치해놨다. 구세군 사령관 선교사 등이 살던 집을 노숙자들에게 내주었다. 사무실을 개방하고 거기서 자고 먹고 직장을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서울에서 5개의 노숙자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역 뒤쪽에는 '브리지센터'라는 노숙자시설이 있다. 삶의 자리를 이어주는 다??역할을 한다는 의미인데 거리에서 노숙하는 분들을 직원들이 일일이 상담을 해서 그곳으로 데려온다. 씻기고 재우고 먹을 것을 주고 옷을 갈아 입힌다. 거기서 며칠이 지나면 집으로 돌려보낼 사람 등을 분류한다. 집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사랑방'이라는 다음 단계로 보낸다. 그곳에서 방을 정해준다. 낮에는 일거리를 찾아서 내보내고 이들이 돈을 벌어오면 최소한의 용돈만 남기고 통장을 만들어 돈을 넣어준다. 얼마 전 저축의 날 대상을 받은 노숙자가 바로 구세군 노숙자시설에 있던 사람이다. 노숙자시설 직원이 관리하는 통장액수가 11억원이 넘는다. 몇십만원부터 1,000만원이 넘는 통장도 있다. 노숙자들이 자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쪽방'으로 내보낸다. 사랑방 다음 단계가 쪽방이다."
-국내 역사는 얼마나 되나.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대장의 일본 순회 집회 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1일 영국인 허가두 사관(Colonel Hoggard) 등 6명이 부산항에 도착한 것이 시초다.이들은 경부열차를 타고 와서 서울 강북삼성병원 뒤편에 구세군 본부를 두면서 시작됐다. 올해로 103년째다. 장로교나 감리교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그 이후 국내에 들어온 다른 교단보다는 빠르다."
-조직운영과 선교비 등은 어떻게 마련하나.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한다. 본부나 기관, 사회복지시설은 전국 160개 정도 등록되어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나 자선냄비, 빌딩 수익 등도 운영비가 된다. 신문로의 구세군회관 운영수입 등도 있다. 현재 충정로 구세군빌딩은 상암동 고아원 부지를 매각한 돈으로 지었다. 40년전에 북아현동에 있던 땅이 있었는데 그걸 팔아서 정부과천청사 뒤쪽에 땅을 좀 샀고, 상암동의 버려진 산자락에도 땅을 샀다. 상암동 개발이 되면서 땅값이 좀 올라서 큰 힘이 됐다."
-왜 군대조직의 명칭을 쓰나.
"구세군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정치·경제가 불안하였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2~1901) 당시 감리교회의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에 의해 1865년 영국 동부 런던의 '블라인드 베거'라는 한 술집 앞의 노상 전도로 시작되었다. 기독교선교회 등의 이름을 붙이고 일을 했다. 당시 윌리엄 부스가 초점을 두었던 전도의 대상은 공원, 다리 같은 데서 노숙하는 사람,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다.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교회, 술집 등을 빌려서 전도를 했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 가까운 교회를 가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교회는 귀족화 되어서 이들처럼 초라하고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이 다시 윌리엄 부스를 찾아와서 '교회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니 우리를 위해서 교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들은 실직자들이고 벌이가 없는 사람들이다.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한다. 그들을 위해 집도 짓고 기술을 가르쳐야 했다. 이런 것을 위해 기독교적인 방법 보다는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조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1878년 세상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군대다라는 의미에서 구세군으로 만들었다. 계급이 있고 유니폼이 있는 조직을 만들어서 세계각지로 퍼졌다."
-군대만큼 군기가 센가.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는 구세군을 준 군대식이라고 말한다. 군 조직의 장점만 따서 하는 것이다. 세상 군대와는 다르다. 1908년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구세군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일제 총독치하상황이라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줄 서양군대가 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구하는 군대입니다'라고 하자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단다. 실제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군과도 비교하는 분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사령관 직책은 임기가 있나.
"세계 124개국의 본부가 영국에 있고 세계를 지휘 감독하는 분이 대장이다. 현재는 캐나다인인데 여자 독신으로써 세번째 대장이 되었다. 작은 나라는 몇 개국을 합쳐서 사령관을 임명한다. 나도 남한 북한 몽골을 합쳐서 사령관이고, 내년에는 캄보디아까지 아우른다. 전 세계적으로 70명 정도의 사령관이 있다. 임기는 따로 없지만 만 65세가 되면 정년퇴직을 한다. 사령관으로 임명 받았을 때는 65세까지 하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사령관을 또 할 수도 있다. 대개 3~5년 정도 한다."
-기독교와의 관계는.
"구세군은 개신교의 한 교단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7개교단이 참가하는데 올해 루터교회, 희랍정교회도 가입한다. 하지만 종교를 초월해서 활동을 한다. 자선냄비 모금을 봐도 그렇다. 한번은 영등포로터리에서 자선냄비 모금을 하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 스님 한 분이 시주를 시작했다. 속으로는 '저분이 없으면 우리가 좀 모금을 더 할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스님은 시주가 끝 난 뒤에 그 돈을 자선냄비에 털어놓고 갔다. 그때 참 부끄러웠다.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스님들이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요청을 해올 때도 있다. 종교를 초월하는 것이 자선냄비다. 올해 45억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국민들이 1,000원씩 450만명이 넣어줘야 가능하다. 다른 모금단체처럼 기업들에게 받는 게 아니라 주로 길거리에서 100원, 1,000원, 1만원씩 받는다. 돈을 내는 사람이 기독교인 천주교인 무신론자 불교도 등 다양하다. 종교를 뛰어넘어 참여하는 것이다. 굶주리는 사람, 어려운 이웃이 있는 한 이들을 함께 돕겠다는 대한민국 국민의 온 희망을 담은 것이 자선냄비라고 본다. 올해 84년째 하고 있다.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은 것이다."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는.
"오래 전 얘기다. 1980년대 초 같은데 충남 논산의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막 나왔는데 전화가 왔다. '우리 손자를 살려달라'는 한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자전거를 타고 갔더니 아이가 많이 아팠다. 그 아이를 데리고 새벽에 논산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들이 문을 닫은 채 열어주지를 않았다. 겨우 한 병원을 찾아 응급실에 입원시켰는데 의사선생님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다'고 했다. 아이의 할머니는 보살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구세군으로 개종을 했다. 80살이나 되신 할머니가 보살처럼 살아가던 그 정신으로 구세군교회에서도 신앙생활을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전화를 걸어 늘 고마움을 표현해주셨다."
-올 연말은 어떤 활동을 하나.
"거리모금은 계속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유지를 한다. 그리고 올해는 '구세군 내복은행 일만천사운동'이 있다. 성탄절에 내복을 전달하는 운동인데 생필품도 받는다. 어려운 이웃 '1만1,004'명에게 성탄절에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올 해는 특별히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다문화가정, 노숙인, 에이즈감염인, 시설 생활자 등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될 이웃들에게 후원자들이 직접 구입하여 전달한 내복, 의류, 문구, 완구 등의 선물을 접수받아 성탄절의 선물로 전달한다. '1만1,004'명의 후원자의 손길로 '1만1,004'명의 이웃들에게 작은 행복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후원 선물은 내복, 학용품, 의류, 신발, 쌀, 김장김치, 어느 것이든 상관 없고 후원자가 직접 구입하여 '구세군 내복은행 일만천사운동' 접수처에 접수하면 구세군은 성탄절을 앞두고 대상자들에게 전달한다."
-북한 등 해외에서도 선교활동을 하나.
"통일부로부터 북한과 접촉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5명 정도가 구세군에서 받았다. 북한과 접촉한 후 정부에 신고를 하면 된다. 북한에는 들어가서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든지 북한에서 요청을 하면 갈 수 있다. 스위스 구세군이 먼저 북한에 들어갔고 우리와 함께 야쿠르트 공장 3개를 지어줬다. 또 6ㆍ25전쟁 전에 지어진 북한의 낡은 병원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해줬다. 북한 고성쪽에서 밤나무 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내년쯤에는 돈사를 지어서 돼지들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다. 수해가 나면 신의주 평양 등으로 구호물자를 보낸다. 개성에도 직접 두 번 갔고 밀가루 콩가루 쌀 감자 등을 북한에 전달했다. 몽골에서는 2008년부터 사업을 했다. 복지사업 교육사업 등이다. 솔롱고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봄부터는 방과후학교를 한다. 매일 150명을 시설에 불러서 식사도 제공하고 교육도 한다. 또 몽골에서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매년 10명씩 한국으로 불러서 치료를 해주기도 한다."
-자선냄비외의 모금활동은 어떤 것이 있나.
"다양하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모금을 받는다. 찾아가는 자선냄비도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ㆍ고등학교에서 불러주면 큰 차에 대형 자선냄비를 싣고 간다. 기업모금도 같이 한다. 기업들이 조금씩 구세군에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데 올해는 더 큰 호응이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성금유용과 직원비리 등의 영향은 없나.
"언론에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모금회의 유용규모가 처음에는 몇십억이라는 식으로 보도가 나왔다가 최종적으로 나온 것은 몇천만원에 불과했고, 나중에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직원들이 회식한 조그만 돈으로 결론이 났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좀 눈감아 줬으면 어려운 사람들이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인데 안타깝다. 물론 검찰은 문제점을 밝혀서 벌 줄 것은 벌 줘야 한다. 하지만 언론은 잘하는 것을 많이 보도 해주고, 잘 못하는 것은 작게 써달라. 이런 복지단체들이 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한다. 구세군도 지난해 자선냄비 모금 시작할 때 그 사건이 터져서 佇좆遲?많이 겪었다."
-경제위기 여파는 없나.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모금액수는 늘어난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84년째 항상 상향조정하지만 반드시 목표액을 달성한다. IMF때도 그랬다. 국민들의 정서가 그런 것 같다. 경제가 어렵다면 도와주는 사람도 더 많아진다. 올해도 정말도 도움을 받을 이웃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국민들이 더 많은 모금을 해줄 것으로 안다."
-직접 모금활동도 하나.
"물론이다. 현장을 돌면서 모금하는 자원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그들과 함께 모금도 한다. 보통의 용기와 희생 정신으로는 거리에 한 두 시간 모금하는 것도 힘들다. 1973년 겨울로 기억된다. 을지로 입구에서 모금을 하는데 영하 25도였다. 거리에서 5분만 서있으면 몸이 얼어붙었다. 지금은 마이크지만 당시에는 양철 메가폰으로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라고 계속 외치면 침 때문에 메가폰에 고드름이 생길 정도였다. 부부가 계속 교대를 하면서 모금을 했다. 눈물겹다. 신촌 영등포 동대문운동장은 유난히 칼바람이다. 보름이상 하고 나면 몸이 힘들다. 올해도 4만5,000명의 자원봉사자가 동원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가 추운 것보다도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실천하기 때문에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액을 주는 사람도 있나.
"한번은 전화가 걸려왔다. 자선냄비에 금일봉을 하고 싶은데 사령관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꼭 직접 만나겠다고 했다. 도봉구 쪽에 사는 노인 부부인데 찾아와서 남편과 부인이 봉투를 따로 내놨다. 자선냄비의 정신이 좋다고 했다. 이름을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다. 재정담당이 봉투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5,000만원 짜리 수표가 두 개의 봉투에 각각 담겨있었다.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떤 때는 냄비 4~5개에 각 200만원씩 넣기도 한다. 가끔씩은 1,000만원씩 넣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이 방송국에 찾아갔으면 이름이 멋지게 났을 텐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분들이다. 올해도 그런 분들이 오리라고 본다. 우리는 그분들을 향해서 천사라고 한다."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먼저 한국 구세군을 맡고 있는 사령관으로서 너무 감사를 드린다. 올해도 구세군 자선냄비를 잊지 말고 동참해서 더 큰 나눔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국민들의 나눔의 손길이 구세군 냄비에 담기면 그 손길은 메아리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반드시 전달된다. 외로워하는 분, 배고픈 분, 추워서 떨고있는 노숙자들, 시설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이고 우리나라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다. 국민들이 구세군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해주기 바란다."
▦박만희 사령관
194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장로교회를 다니다 구세군교회로 옮겼고 75년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했다. 89년 감리교신학대 선교대학원을 졸업했고 90년 영국 런던의 구세군 국제사관대학을 수료했다. 이후 20여년간의 목회사역 등을 했고 한국 구세군 본부에서 공보편집인 등을 거쳐 지난해 10월 한국 구세군 제23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구세군 조직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행정상 군대 조직의 형태를 취한다. 대장(General)은 영국 런던 국제본부(IHQ)의 행정부를 통해 124개국의 구세군을 인솔한다. 참모총장(Chief of the Staff)은 부서들간의 연락을 취하고 대장의 결정 사항을 수행하는 군대의 수장(chief executive)이다. 국제본부는 구세군의 전 자원을 세계 각지에 할당하고 매일 매일의 사업을 관리한다. 세계 구세군은 총 5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ㆍ카리브해, 유럽, 남아시아, 남태평양ㆍ동아시아 등. 각 지역은 여러 군국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군국의 지도자는 사령관(Territorial Commander)이다.
조재우 선임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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