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초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유럽연합(EU) 모든 국가들의 신용등급 강등을 시사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 부도 위기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큰 나라로 확산되면서 유로존 붕괴도 점점 현실성을 띄어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유로존 국가들의 경제위기를 과도한 복지의 위기로 몰아간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재정능력을 감안 않고 국민들에게 무리한 복지혜택을 베풀었기 때문에 국가 빚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해 위기를 불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위기 와중에 독일이나 스웨덴처럼 복지지출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가 안정적이라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또 만일 유럽 위기가 정부부채 때문이라면 부도위기에 몰려있어야 할 국가는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이어야 한다. 올해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는 89%에 달해 스페인(72%)보다 17%포인트나 높다. 하지만 현재 스페인 국채의 이자율은 6%를 오르내리는 반면 영국 국채 이자율은 2%대로 안정적이다. 결국 EU의 위기는 단순한 재정위기가 아닌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EU의 위기를 유로존 자체의 위기로 진단한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경제대국 미국에 맞서기 위해 유럽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통합하자'는 이상론에 휩쓸려 회원국간의 경제적 격차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하나의 통화로 묶은 것이 재앙의 근원이다. 자유무역체제에서 국가가 맡는 중요한 기능은 화폐 발행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국가는 자국의 무역적자가 심하면 화폐 발행을 늘려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자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적자를 만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그리스나 스페인 정부는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무역적자를 방어할 정책수단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이득의 대부분은 유로존 창설로 통화가치 실질하락 혜택을 입은 독일 등 선진 산업국에게 돌아갔다. 오늘날 스페인과 영국의 차이점은 영국은 스페인과 달리 신중하게 유로존 가입을 거부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무디스의 EU 회원국 신용등급 강등 경고가 있던 다음날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부수법안 14개에 서명하며 "세계 최대시장 미국을 여는 것"(세계 최대시장은 미국이 아니라 EU다) 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얼마 후 김하늘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한미FTA가 사법주권을 침해한 불평등한 조약일 가능성이 있다"며 재협상을 위한 사법부의 적극 대응을 촉구했다. 김 부장판사의 지적은 한미FTA 반대론자의 불안감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도박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한미FTA로 미국 시장이 우리나라의 앞마당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그렇게 될지 반대로 의료 정보통신 제약 법률 대중문화 등 우리나라의 차세대 주력산업이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 밀려 설 땅을 잃게 될지는 양국의 노력에 달려 있다. 반면 한미FTA 발효로 우리나라 주권이 일정 부분 제약될 경우 이를 되돌리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사실'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성'의 영역이다.
유로존 가입과 달리 한미FTA가 우리나라 화폐까지 박탈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부는 1998년 스페인 정부가 '세계최대 단일시장 가입'이라는 불확실성을 얻기 위해 '자국의 통화'라는 확실성을 판돈으로 걸었던 것과 유사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씻을 수 없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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