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을 빛낸 최고의 예술가는 누구일까?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지만 단연 무용가 최승희가 아닐까 싶다. 최승희는 숙명여고 시절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그의 춤에 매료되어 무용가의 길을 걷는다. 일본에 유학해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 후 조선의 전통과 접목해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한 춤의 선구자다.
최승희가 정립한 신무용은 한마디로 '전통의 현대화'의 산물이었다. 그는 신무용을 무기로 미국과 유럽, 남미에까지 진출해 우리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떨친 애국자였다. 일제강점기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해 세계적 스타가 된 예술가는 아마도 최승희가 유일하지 않을까.
최승희가 세계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솔로댄서로서 훌륭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또 천재적 무대기술로 동양의 신비와 이국적인 멋을 구현해 서양인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치열한 창작정신과 예술적 열정도 그를 세계적 무용가로 위치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근대 대중스타로서의 활약은 더욱 흥미롭다. 30년대 중반 무용가로서 인기가 절정에 이르자 영화배우, 광고모델, 음반취입을 요청하는 주문이 쇄도한다. 콜럼비아 음반회사를 통해 '향수의 무희', '이태리의 정원' 등 두 곡의 대중가요를 취입하기에 이른다. '이태리의 정원'은 재즈송의 형식을 띠고 있어 더욱 놀라움을 안겨준다.
최승희는 근대 광고의 주역이기도 했다. 춤으로 단련된 균형 잡힌 몸매의 서구적 용모는 모던풍의 세련된 이미지가 더해져 대중들의 취향과 감성, 미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 무용가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 '반도의 무희'에 출연해 상당한 돈을 벌었고, 이를 발판으로 세계무대 진출을 모색해 성공을 거둔다.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순수 무용예술을 위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현실논리에서 대중을 겨냥한 상업적 성격의 활동을 수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근대 공연예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최승희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닌 예술가였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남산 아래 차린 무용연구소의 존재방식에서 찾아진다. 신문에 연구생 모집광고를 내면서 공연할 때마다 보수를 지급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공연을 일(노동)로 간주해 보수를 지급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춤의 상품적 가치를 추구한 최승희는 공연기획에서도 전문성을 지향해 차별화를 모색했다. 해외공연 때 세계적인 흥행사와 공식계약을 맺고 기획의 전문성을 구현했음은 좋은 예다. 미국공연에서는 당시 최고의 흥행사 메트로폴리탄뮤직컴퍼니와 연결해 세계무대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40년대 초반 동경 제국극장에서 가진 무용발표회에서 공연 레퍼토리를 네 가지로 유형화해 관객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한 방식도 이채롭다.
최승희와 자본주의와의 친연성은 이렇듯 여러 사례에서 포착된다. 해방직후 월북한 최승희는 북한무용 토대 형성에 기여했지만, 60년대 후반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부르조아 성향과 자본주의적 속성이 강하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근대무용의 여명을 연 무용가 최승희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의 창작정신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메카니즘 속에서 최승희의 존재론적 의의를 탐사하는 것도 의미로운 일이 아닐까.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