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궤에 이어 4대 문화재 환수에도 북한이 참여하기로 해 운동이 엄청 힘을 받게 생겼어요. 북한이 필승 무기 보유국이기 때문이죠."
최근 북한을 방문해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과 4대 문화재 환수의 공동 추진에 대한 합의를 이끌고 돌아온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온 맘 평안해야 한 불자답지 않게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북한의 참여가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한국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짚신 막도장 같은 허접한 물건 몇 개 달랑 받고는 문화재청구권을 포기했어요. 이제는 국제법상 요구도 못하는 한심한 신세죠. 반면 북한은 2002년 조일평양선언을 하면서 양측이 문화재 문제를 성실히 협의키로 해 문화재청구권을 확보해 뒀죠." 혜문 스님은 그래서 4대 문화재에 대해 일단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각국에 반환을 요구한 뒤 실패할 경우 국제법상 문화재청구권을 가진 조불련에 부탁할 방침이다.
능력자 북한의 진면목은 이미 여러 차례 입증됐다. 2005년 야스쿠니(靖國)신사 북관대첩비, 2006년 일본 도쿄(東京)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최근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 조선왕실의궤 반환은 모두 조불련이 큰 역할을 해 냈다.
이번에 남북이 합의한 환수 대상은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조선 제왕의 투구와 갑옷, 중국 랴오닝(遼寧)성 따롄(大連) 뤼순(旅順)박물관 소장 금강산 장안사 종, 도쿄 오쿠라호텔 소장 고려석탑,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금은제 라마탑형 사리구다. 모두 반출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반환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투구와 갑옷은 오쿠라(大倉)재단이 샀다는데 엄격히 관리되는 왕의 물건을 판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장안사 종은 일본 승려가 떼 간 것이고, 고력석탑은 일본 총독부가 오쿠라재단에 선물한 것이고, 사리구는 일본인이 도굴했고. 이 문화재들 생각하면 힘없던 나라가 생각나 열불 나고 지금도 이것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한심해 또 열불 납니다."
그러나 합의가 나오기까지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혜문 스님은 2007녀부터 3년 간 북한을 20여차례 방문해 "북관대첩비 등 북한의 협조로 환수된 문화재 이외에도 빼앗긴 문화재가 부지기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처음에 잘 이해를 못했지만 거듭된 설득에 분위기는 점차 바뀌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환된 북관대첩비를 방문에 문화재의 추가 환수를 위해 남죽이 협조하라고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문제는 남한 정부가 됐다. 남북 관계 경색으로 남북 합의를 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 하지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던가. 기회가 찾아왔다. 정부가 얼마 전 중단됐던 남북 교류의 물꼬를 터 준다는 의미에서 혜문 스님의 방북을 승인했고, 덕분에 5ㆍ24조치 이후 처음으로 남북 합의가 나온 것이다.
혜문 스님이 문화재 환수 운동이라는 몹쓸 고역을 시작한 것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조계종 봉선사에서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2001년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던 그는 2003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한 철안 스님의 명으로 관할 사찰 중 27개에 대해 문화재 현황을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 시절 그는 도쿄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에서는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돼 버린 조선왕실의궤도 발견했다. 귀국한 그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구성, 반환 운동에 앞장서 환수를 이뤄 냈다. 조선왕조실록이 돌아온 후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반환받게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그는 조만간 내주 조선왕실의궤 반환이 자기 일처럼 기쁘다. 그는 "현대판 의병운동의 승리"라며 "북한에서 전시하는 방안에 조불련과 의견 일치를 봤는데 남한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역사적 사건을 온 겨레가 기렸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이은호 선임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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