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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람/ 다단계업체, 이젠 아버님·어머님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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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람/ 다단계업체, 이젠 아버님·어머님 노린다

입력
2011.12.0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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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정명식(가명ㆍ36)씨는 요즘 다단계업체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전립선암 말기로 수술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편찮은 아버지(68)가 다단계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혈액 순환에 좋다며 황칠나무 진액을 134만원이나 주고 산 이후 전국을 돌며 회원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못하게 만류하면 "이거라도 먹고 좀 몸이 나아지려고 하는데 왜 막느냐"는 원망이 돌아올 것이 뻔하고, 그냥 놔두자니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할까 걱정이 크다.

게다가 아버지를 말리던 어머니까지 갑자기 다단계에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며칠 전 다단계업체 직원들이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을 찾은 이후부터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성 3명은 "6개월만 고생하시면 월 600만~1,000만원은 너끈하게 벌 수 있다"면서 "식당 일은 이제 그만두라"는 권유까지 했단다.

한 달 만에 회원 서너 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물건을 판 대가로 3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보여주며 자랑하시는 아버지,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 정씨는 부모님의 이런 모습이 불안하다. 아버지가 다단계에 빠진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그는 과거 경험을 통해 더 높은 관리자 직급이 되기 위해 할당량을 채우려면 더 많은 회원을 모집하거나, 빚을 내서라도 물건을 사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이번만큼은 다르다.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다"며 절대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거마 대학생 다단계업체에 대한 경찰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로 젊은층을 상대로 한 다단계 업체들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중ㆍ장년층을 겨냥한 다단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거짓 미끼로 수십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밀려나 박탈감에 시달리는 퇴직자나 생활고에 찌든 영세 자영업자들을 낚고 있는 것이다.

중ㆍ장년층을 노리는 다단계 수법은 이렇다. 속리산, 경주 등 관광지 콘도나 호텔에서 1박2일 설명회를 연다. "공기 좋은 곳에서 건강기능식품 설명을 듣고 간단한 설문지만 작성해주면 된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하지만 "만성적인 아토피가 씻은 듯 나았다" "암 말기 진단을 받았지만 이 제품을 먹고 5년 째 건강하다. 의사들도 놀란다"는 등 체험자들의 '간증'과 판매사원들의 온갖 감언이설로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제품을 사면서 회원 등록을 하는 순간, 다단계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회원을 모집해 3개월 누적 매출이 1,000만원을 넘으면 실버 등급, 5,000만원을 넘으면 골드 등급으로 올려주고 상위 등급일수록 수수료율도 높아진다는 식이어서 회원들은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다단계 수법이다. 하지만 자기가 모집한 회원들, 소위 하부조직에서 일정한 매출을 계속 올리지 못해 등급이 떨어지는 걸 막으려면 자기 돈을 들여 물건을 사야 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결국 빚만 지게 된다"고 말했다.

중ㆍ장년층을 상대로 하는 다단계는 합숙을 강요하거나 직접 대출을 알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마대학생 다단계와 구분된다. 지난달 30일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19억4,400만원을 부과 받은 이엠스코리아의 경우 서울 송파구, 성남시 등에 100여개의 합숙소를 마련해놓고 대학생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했다. 휴대폰을 압수하고, 신발장에는 자물쇠를 채웠다. 관리자들이 문 앞에서 잠을 자거나 불침번을 서 야반도주도 막았다. 또 대출업체를 알선해주고 보증을 서는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옭아맸다. 물건을 팔지 못하면 수시로 욕설과 협박을 일삼았다.

하지만 중ㆍ장년층은 가둬놓고 윽박지를 필요가 없다. 대부분 경제권을 갖고 있는 가장들이어서 돈에 대한 욕망만 자극하면 알아서 돈을 싸 들고 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A씨는 올해 초 집을 담보로 600만원을 대출받아 물건을 잔뜩 샀다. A씨의 딸은 "꿀, 홍삼, 건강기능식품이었는데 다 해도 50만원이 넘지 않아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업체에서 가족들이 반품하라고 할지 모르니 산 물건은 일단 다 개봉해서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아버지에게 알려주기도 했다"며 업체의 상술에 혀를 내둘렀다.

중ㆍ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다단계 현황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떤 형태의 업체가 몇 곳이나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꼭 다단계 판매원을 해야겠다면 한국특수판매공제조합, 직접판매공제조합에 가입한 업체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조합은 다단계 업체가 계약 철회, 환불을 거부할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제도에 따라 대신 보상해준다. 물품 구매계약일로부터 3개월 내에 물품을 업체에 돌려주고 반품 확인서를 받아 조합에 제출하면 된다. 조합 가입 여부는 공정거래위원회 홈페이지(www.ftc.go.kr)의 사업자 정보 조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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