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경험이라고 제목을 써놓고 보니 완전 낚시성 제목이다. '처음'이 주는 설레임, 두려움, 기대감… 모든 '첫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자극과 힘을 가진 것 같다. 지난 주 김장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 주에 엄마가 김장을 했다. 결혼 16년차인데, 아직도 김장김치를 친정서 얻어다 먹는다. 해마다 김장 때 내가 하는 일이란 뒷설거지 정도다. 그런 내가 올해 '처음으로' 김장 속을 쌌다.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무채 버무린 속을 넣어 싸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옆에서 속을 싸고 있는 프로 주부의 손놀림을 끊임없이 곁눈질하며 작은 김치통 하나를 겨우 채웠다. 뿌듯하고 대견하다. 나이 마흔 다섯 넘어 처음 김장 속 싸본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배추 절이고, 갓에 미나리에 파 다듬고, 마늘까서 다지고, 코다리 국물내서 고춧가루 양념 만들고, 무채 썰고 버무리고… 배추 속을 싸기까지 김장에 들어가는 그 수많은 과정을 몇 십년이나 계속해 온 모든 엄마들의 수고가 새삼 더 고맙게 느껴졌다. 이제 중학생인 딸이 더 자라 결혼을 했을 때, 나도 모든 엄마들처럼 딸에게 줄 김장을 척척 해서 줄 수 있을지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모든 '첫 것'에 좋은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TV 화질이 갑자기 흐려지고 퍼져버렸다. 지난 월요일 오후부터 케이블TV가 지상파 3사의 고화질(HD)방송 송출을 중단하면서 770만 가구가 불편을 겪고 있는데, 우리 집도 거기에 속한다. 이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지상파 재송신문제, 지상파 콘텐츠를 재송신하는 대가 산정 문제로 늘 갈등이 있었던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이지만, 이렇게 소비자를 볼모로 어느 날 갑자기 채널 송신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다. 집에 가면 TV를 끼고 사는 평범한 시청자의 한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는 왕이라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이 입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사업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정책담당자에게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첫경험을 강요 받은 나는 뿔나기 직전이다.
오늘, 그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종합편성 채널 4개가 드디어 '첫방송'을 시작한다. 보수 성향의 신문사들이 소유한 채널들이 어떤 색깔의 어떤 내용들로 안방을 찾아올지 솔직히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다. SBS가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후발주자로서 경쟁방송사를 따라잡기 위해 과도한 선정성으로 승부를 걸었었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8시 종합뉴스는 심지어 '뉴스쇼'라는 이름으로 남자 앵커와 여자 영화배우가 진행을 하기도 했다. 종편을 허가받은 신문사들이 자기 종편사 홍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모습이 벌써부터 보인다. 억대의 출연료, 유명 연예인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 엄청난 상금을 건 오디션 프로그램 등 종편사들의 과열된 경쟁 역시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남을텐데 걱정이다.
12월 첫날부터 송년회 일정이 잡히기 시작한다. 기름지게 먹고, 퍼지게 술 마시고, 취한 채 2차 가고, 일부는 노래 부르고 일부는 졸고 일부는 싸우는 송년회 그림이 병풍처럼 지나간다. 올해 송년회는 지금까지의 송년회를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각박하게 지난 1년을 살았으니, 12월에 잡히는 송년회는 따뜻하고 여유롭고 설레는 새로운 '첫경험'으로 채워보면 좋을 것 같다. 술집보다 박물관, 노래방보다 미술관은 어떤가.
김영주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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