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인 도움이 필요한 여의사에게 접근해 거액의 돈을 뜯어낸 전직 경찰 총경이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그는 범행 과정에서 피해자와 결혼을 하고, 고가의 벤츠 승용차까지 받아 사용하는 등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 정영훈)는 29일 서울 강남구의 한 성형외과 원장인 A씨를 속여 거액을 편취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 등으로 기소된 전 서울 방배경찰서장 K씨에게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K씨가 A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당시 A씨는 의료사고와 관련해 고소 당한 상태로 법률적 도움이 절실했다. 손님으로 위장해 A씨를 찾은 K씨는 "당신은 운이 너무 좋다. 나는 (사건을 맡은) 동부지방검찰청장과 막역한 사이"라며 접근했다.
그는 자신을 "경찰의 꽃인 총경 출신인데 현재는 차관급으로 암행어사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며 "외부에 드러나지 않지만 대통령과 아침마다 독대하는 장관을 모시고 있다"고 소개했다. 당시 K씨는 영화제작업체인 B사의 바지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A씨가 자신의 말에 솔깃하자 K씨는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신 사건은 '누지른 사건'(검사장이 지시한 사건)으로 검찰에서 관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겁을 주고는 "청와대에서 힘을 써줘야 한다. 2억5,000만원을 마련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K씨가 돈을 건네받을 당시 이미 검찰은 A씨를 기소한 뒤였다.
K씨의 사기 행각은 멈추지 않았다. "도와준 지청장이 승진하도록 검찰총장에게 돈을 줘야 한다"거나 "재판 담당 판사에게 인사해야 한다" "내가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부총장인데, 박사 학위를 받게 해주겠다"는 등의 말로 그는 2004년 초까지 A씨에게서 7억4,000만원을 받아냈다. 항소심까지 진행된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A씨는 모든 게 K씨 덕이라고 믿었다.
K씨가 자신의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출연하는 등 하면서 잠시 관계가 소원해졌던 두 사람은 1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났다. 병원을 이전한 A씨는 세무조사를 당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K씨를 찾았다. 결과는 역시나 같은 수법으로 5,000만원을 더 줘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년이 안돼 결혼식까지 올렸다. K씨는 이즈음 A씨 명의로 빌린 고가 승용차 벤츠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뒤늦게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K씨를 검찰에 고소한 A씨는 2009년 말 K씨와 합의이혼했고, 현재 재산분할소송이 진행 중이다.
재판부는 "(고위 경찰 출신인) 피고인의 행각을 이해할 수 없다. 피해자가 법률을 전혀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공무원에 대한 청탁 등의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편취한 점은 공권력과 사법절차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 것으로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밝혔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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