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화학이라는 기초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진짜와 가짜를 넘나드는 어중간한 의사다. 의사면허 취득 이후 지금까지 병원이 아닌 대학을 삶터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픈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던 의사로서의 꿈은 아직도 내 마음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60·70년대, 누추해 보이기까지 하는 진료실 입구와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 있었던 대기실의 허름한 의자, 의료기구라고 해야 고작 청진기와 머리에 둘려 있는 거울 반사경 정도였고 심지어 엑스레이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환자의 몸과 의사의 귀를 연결해 주는 청진기는 지금의 고감도 엑스레이, 심전도를 넘어서는 만능 열쇠였으며, 신중하고도 진지한 문진(問診)과 시진(視診), 촉진(觸診), 타진(打診)은 초음파기, CT, MRI, PET-CT에 버금가는 마법이었다. 의사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환자를 가족이나 일가친지와 같이 생각하고 돌보았으며,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병과 생명을 온전히 맡기며 한없는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 법 없이 산다는 말이 있는데,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기가 버거웠고,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너와 나'가 함께 어우러지는 생활 속에서의 아름다운 문화는 나에게 의사로의 꿈을 심어주었다.
간디(1869~1948)는 종교와 민족, 세대를 초월해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손꼽히는 인물이다. 삶으로 남긴 족적뿐 아니라 예지가 번득이는 그의 명언은 현존했던 당시뿐 아니라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남아있다.
간디는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사회악 7가지를 경고했다.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경제,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원칙 없는 정치 등이다. 구구절절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심사 숙고하도록 동인하는 통찰이 담겨있다. 각 요소들을 곱씹으며 나는 이들 모두가 문화와 문명 사이의 괴리로 집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정신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조절이나 절제,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물질문명은 그 긍정적인 역할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약 16년간을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인도 북부의 라다크에 머물면서, 극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1,000년 이상 평화롭고 건강하게 유지되었던 공동체 문화가 서구 문명의 침습에 의해 전 방위적으로 붕괴되어 가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에 대한 극복 의지 등의 체험을 저서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로 남겼다. 오래된>
현실 생활 속에서 문화와 문명을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대척점에 놓고 선택과 비판을 일삼을 수는 없다. 질주하고 있는 문명의 달콤함에 이미 충분히 길들여져 있는 우리들이지만, 양말 속의 작은 돌처럼 시시때때로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를 사람다움으로 인도하고 있는 신념, 양심, 윤리, 인격, 인성, 희생, 원칙의 고귀함을 우리는 의식하고 있다.
느리고 답답하며 때로는 편리함을 조금 양보해야 할지라도 온전히 깨어있는 문화를 덧입은 문명을- 마치 금슬 좋은 부부와도 같이 어우러지는 문화와 문명의 멋을 - 맛보며 살아가고 싶다. 한 번은 들어 보았음직한 미국 원주민 이야기가 간디의 경구와 상통한다. 그들은 사냥이나 이동을 할 때 열심히 달려가다가도 갑자기 말에서 내려서 한참을 가만히 서있는데, 이는 너무 빨리 달려서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돌아온 그 길을 보며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란다.
백광진 중앙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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