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가장 걸출한 문화인을 꼽으라면 단연 한창기(1936~1997)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1976년 순우리말로 이름붙인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84년에는 샘이깊은물을 창간해서 일본식 글쓰기가 아니라 우리 입말로 바르게 글쓰는 법을 널리 알리는 한편 개발독재를 비판하고 전통문화를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매달 판소리감상회를 열어 판소리를 부활시켰고 팔도의 전통음악을 채록하는 일에도 나섰다. 차문화와 전통염색 유기 옹기 등 지금은 일상이 된 전통문화가 모두 그가 아니었으면 사라졌거나 천대를 받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나까마'로 불릴만큼 문화유물 수집에도 공을 들였다. 그가 평생 수집한 유물 6,500여점이 21일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 가까이에서 개관한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통해 일반에 공개됐다. 월인천강지곡과 정순왕후국장반차도, 청동기 시대 붉은간토기, 별도끼, 고려시대 청자철화모란문주자, 김홍도의 그림 등 문화재와 보물급이 즐비한 이 유물을 그의 사후 14년간 지켜 박물관을 세우는데 헌신한 차정금(58) 뿌리깊은나무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차 이사장은 평생 독신으로 산 한창기의 제수이다.
_어떻게 박물관을 만들게 되셨나요?
"시숙님(한창기)께서 1997년 2월에 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유언이 평생 모아오신 유물을 지키는 박물관을 만들 것과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복간하는 것이었어요. 뿌리깊은나무가 80년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폐간된 것을 늘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러나 뿌리깊은나무의 복간은 시숙님의 정신을 이어갈 수준이 안되면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오로지 박물관에 몰두했습니다. 시숙님 돌아가시고 바로 그 이듬해 1월에 남편이 똑같이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는 수술 받으면 살 수 있다고 하는데도 출판사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빼빼 말라서 세상을 떠난 것이 바로 수술 받다가 잘못 되면 형님의 유지를 못 받든다는 게 이유였으니까 박물관 건립은 남편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_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순조로웠습니까?
"말도 못하게 힘들었습니다. 박물관 만드는 일이 오래 걸리니까 가족이 유물 차지하려고 한다, 기증 안하고 팔아 먹었다, 별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남편이 98년 9월 27일에 세상을 떠나고 10월에야 박물관 허가가 나왔으니 성북동 출판사 건물에서 샘이깊은물을 발행하면서 2층에 유물관을 만들어서 전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버스도 오지 않고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보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이래서는 시숙님의 뜻을 알리기는 힘들겠다 싶어서 고민을 하던 차에 2000년 샘이깊은물 문화교실 침선반 학생들과 한국자수박물관 견학을 갔어요. 허동화 관장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더니 '한창기 선생 생전에 이제 유물을 공개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고향으로 가야지요 라고 했다'고 전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고향에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_고향은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 아닌가요?
"허동화 선생님 말을 듣고 무작정 보성군수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어요. 저희가 옹기와 잎차 사업을 하는 벌교읍 징광리의 땅 2,000평을 내놓을 테니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요. 그런데 이미 있는 미술관도 군의원들이 재정지원을 문제삼는다고 어렵다 하시더군요. 시숙님께서는 순천중학교를 나오셨고 이 낙안읍성을 참 좋아하셨어요. 우리 문화가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은 이 낙안읍성밖에 없다고 하시며 우리나라 문화재 보전의 기틀을 마련하신 예용해 선생님(1929~1995)께 말씀드려 1983년에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되게 한 분도 시숙님이십니다. 선암사도 참 좋아하셔서 그곳이 허물어져가니까 독지가들을 모아서 살리신 일도 하셨으니 순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지요. 낙안읍성은 고향에서 15분 거리니까 여기도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03년에 무작정 순천시장님을 뵙고 말씀을 드렸더니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그래서 시장님부터 담당 시의원, 관련 공무원까지 모두 성북동으로 초청을 해서 지하수장고까지 다 보여드렸습니다. 그때 유물 2,000여점을 모두 기증할 테니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하니까 시장님께서 '제 집을 팔아서라도 지어드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004년에 순천시와 박물관 건립에 관한 협약을 맺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_짓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2005년에 시장이 수뢰사건으로 구속되고.
"그 일은 너무 괴로워서 그때는 저도 저수지에 빠져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성북동 집을 판 예산 12억과 순천시에서 지원한 21억원을 가지고 공사를 했는데 시장님 주변에서 그래요. 이렇게 큰 지원을 받으면 리베이트를 내놓아야 한다고. 재단으로 들어간 돈은 어쩔 수 없으니 집을 잡혀서 5천만원을 대출을 받아서 드렸습니다. 결국 시장님이 구속되고 저도 재판을 받고…하지만 그 시장님이 한창기 선생을 알아보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겠습니까. 주변에서 반대는 오죽 많았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그 시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_박물관 옆에 있는 한옥도 박물관의 일부지요?
"네, 원래 구례에 있던 인간문화재 김무규(1908~1994)선생의 고택인데 다른 사람에게 팔려서 허물어져 가던 것을 재단에서 사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제 고향이 구례입니다. 시집온 이듬해에 남편이 저 집을 보러 가자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시숙님이 저 집에 관심이 있어서 사고 싶어했는데 다른 곳에 팔려나가 살 수가 없었습니다. 2001년에 김홍남 (전)국립박물관장님과 친구들이 구례 운조루하고 저 집을 보러 와서 제가 안내를 했어요. 집이 다 허물어져서 천막으로 덮여 있고 지붕에 타이어가 올려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군수님을 만나서 저 집을 보존해야한다고 했더니 구례는 경주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아서 저 집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순천시하고 박물관 짓자 이야기가 되니까 김홍남 관장님이 저걸 사서 옮기라고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_구례 사람이 어떻게 벌교 사람과 혼인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광주교대를 나오고 구례의 중앙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79년에 이웃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큰시누의 남편이 오셨어요. 부임인사차 저희 학교에 들르셔서 저를 보시고는 처남댁을 삼고 싶다 하셔서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_시아주버니인 한창기 선생의 첫 인상은 어땠나요?
"혼인하기 며칠 전인 12월 초에 제주도에서 회의를 마치고 구례로 오셨어요. 참 멋쟁이였지요. 팔목에 여성용 롤렉스시계를 차고 오셨는데 돌아가신 시어머니한테 70년대에 홍콩에서 사다드린 선물이었대요. 어머님이 그걸 받고는 첫째든 둘째든 먼저 결혼하는 첫 며느리한테 선물하신다면서 그대로 장롱에 넣어둔 것이라며 저한테 주시더군요. 팔목이 너무 커서 저도 두어번 차고는 그대로 장롱에 두었다가 큰며느리한테 주었습니다. 시숙님은 시아버지 대신이라 늘 어렵게만 대했지만 제가 애 셋 낳을 때마다 병원으로 장미꽃다발과 함께 편지까지 써 보내주시는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애들한테는 고궁도 호텔도 데려가시고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도 함께 먹고…. 한 번은 애들을 일주일마다 책을 사 주고는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시더군요. 시숙님은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애들한테 얘야, 이렇게 해라 그러면 다 할 줄 알지. 애들이 모두 시숙님처럼 공부를 좋아하고 영재성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몇 주 만에 접으셨지요.(웃음)"
_애들 이름도 한창기 선생의 작명인가요?
"네, 첫째는 물이 넉넉히 들어오는 논이라고 무논이고 둘째는 농기구 이름을 따서 나래, 셋째는 목화다래에서 온 다래입니다. 무논이는 어려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아서 자기 자식은 꼭 한자로 짓는다고 하더니 첫 딸을 낳자마자 효연이로 이름을 짓더군요.(웃음)"
_아까 유물은 2,000여점이라고 하셨는데 시립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서 낸 자료에는 6,500여점입니다.
"저도 전체 유물을 살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얼마인지를 몰랐습니다."
_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지 않은 점을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지요.
"한글전적류만 해도 국내 최대일텐데 이렇게 많이 순천으로 가는 것은 아깝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영구임대해라, 이런 말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두 개 빼내면 한창기 선생 전체를 보여 줄 수 없잖아요."
_출판사를 물려받았을 당시 빚도 제법 있었다고 했는데 물건을 팔아서 돈을 댄다거나 포기하고 싶은 심정은 없었습니까?
"그러면 안되지요. 그건 우리 시숙님을 파는 거랑 똑같아요. 뿌리깊은나무 제호를 팔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좇아다녀도 들은 척도 안했어요. 1995년에 이 유물을 맡겨 두었던 곳에서 화재가 나서 일부 유물이 훼손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숙님의 유언에 따라 출판사 빚을 갚기 위해 유언집행인들이 몇 점을 판매했습니다. 2005년에 (뇌물수수건으로) 박물관 공사가 중단되자 주변에서 문화재로 지정되면 공사재개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포장되어 있는 유물을 풀기는 힘들어서 전문가를 불러서 석물을 살펴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제가 석물을 팔려고 감정을 했다는 소문이 나더군요. 애들 아버지와 제가 물려받은 이후에는 시숙님의 유물 한 점에도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시숙님이 결혼을 했으면 내가 이런 짐은 안 졌을텐데, 형님 수고해요, 이 말만 하면 됐겠지, 그런 생각은 가끔 했지요.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문화에 천재성을 띈 그 양반을 알리는 이 박물관을 안 만들어 주고 가면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_혹시 뭘 수집하신 것은 없습니까?
"저는 애들한테 성냥개피 하나 우표 하나 수집하지 말라고 해요. 후대에 관리하는 사람이 너무 고달픈 일이니까. (웃음) 우리 며느리한테도 지금 네가 쓰는 물건이 200년 300년 후에 골동품 되는 거야, 네가 지금 후대의 골동품 미리 쓴다고 생각하고 수집하지 말아라 그래요. 얼마나 징그러우면 그러겠어요."
_앞으로 또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시숙님이 쓰던 펜 옷 신발 안경 책상 식탁 쉬시던 장의자, 출판자료, 문화사업으로 개발한 물건, 포스터 광고, 모든 생활용품을 순천시에 50평 아파트를 사서 그대로 모아두었어요. 그분이 모아놓은 유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한창기 선생의 삶 자체도 하나의 유물이잖아요. 이 전시관을 꼭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혼자 힘으로 이곳 징광리에 22만평 차밭을 꾸리고 전통옹기를 되살린 사람입니다. 이번 기회에 남편이 언제나 형님 덕을 받았다는 오해가 풀리고 형님의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도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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