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매운 맛 전성시대다. "불황일 때 매운 음식이 잘 팔린다"는 식품ㆍ외식 업계의 속설이 올해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런데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우선 시각적인 측면. 라면의 경우, 기존에는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 빨간 국물이 대세였지만, 점점 그 자리를 매운 '햐얀 국물'이 대신하고 있다. 또 매우면서도 텁텁하지 않은, 칼칼하면서도 입안 가득 개운한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매운 맛의 재발견을 이끈 상품은 8월 출시된 한국야쿠르트의 꼬꼬면. 이달 말로 누적 판매량 6,000만개 돌파를 앞두고 있다. 컵라면 형태의 '꼬꼬면 왕컵'도 출시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950만개나 팔렸다. 닭 육수와 매운 청양고추가 어우러진 이 제품은 '라면=빨간 국물'이라는 기존 공식을 뒤집은 하얀 국물에 시원한 매운 맛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있다.
꼬꼬면과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삼양식품의 나가사끼 짬뽕도 돼지뼈 육수와 해물 맛이 특징. 8월 300만개, 9월 900만개, 10월 1,400만개에 이어 이달 1,700만개 예상 등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다. 이 같은 '백색 국물' 돌풍에 오뚜기도 최근 '기스면'을 급하게 내 놓았다. 세 제품 모두 하얀 국물에 청양고추를 넣어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매운 맛과의 차별화를 시도한 게 공통점.
식품업계와 외식업계들도 분주해졌다. 다 같은 매운 맛이 아닌, 소비자들의 취향에 따라 매운 맛을 등급별로 나누거나 첨가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닭, 족발, 짬뽕 등 과거 특정 품목에 한정됐던 매운 맛은 이제 피자, 쌀국수, 커리, 스파게티 등 업계 전반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대상의 청정원 순창고추장의 경우, ▦순한 맛 ▦약간 매운 맛 ▦보통 매운 맛 ▦매운 맛 ▦매우 매운 맛 등 제품 등급이 5단계. 오뚜기 카레도 매운 맛, 약간 매운 맛 등 2종이 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판매하는 구운양파의 경우, 최근 매운 맛 버전이 출시된 이후 이달 기준 판매순위 17위로 13계단이나 뛰어 올랐다. 삼각김밥 가운데 유일하게 밥이 빨간색인 '전주비빔삼각김밥'은 수 년째 판매량 1위를 지키고 있고, 올 상반기 전체상품 판매순위에서도 3위에 올랐다.
매운 맛의 인기비결은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이 체내에 엔도르핀을 분비시켜 스트레스나 우울감을 줄여 기분전환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 불황일 때 몸과 혀가 알아서 자극적이고 매운 맛을 많이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직장인 이모(36)씨는 "매운 음식 먹고 땀 한번 쭉 빼면 회사나 가정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매운 맛 돌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황교익 맛칼럼리스트는 "우리나라 음식은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음식에 버무리는 경우가 많은데 원재료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돼 미각이 점점 무뎌질 수 있다"며 "달고 짜고 매운 맛에 익숙해지면 입맛도 그만큼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강은영기자 kis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