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장' 반도체사업까지 접은 필립스, 조명·의료기기로 우뚝
기업의 화두는 언제나 미래 먹거리 개발이다. 지금 승승장구하는 기업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지금의 기업환경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기업들은 더욱 미래먹거리를 더욱 고민하게 된다. 미래를 고민하는 글로벌기업들과 국내기업들의 움직임을 짚어 본다.
필립스가 2006년 반도체 사업을 접겠다고 발표했을 때 안팎에서는 "심장을 바꾸는 짓"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반도체는 위기의 필립스를 그나마 먹여 살린 핵심 사업이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필립스를 살리려면 중대한 변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심장을 바꾸는 심정으로 반도체사업을 83억유로에 매각했다.
네델란드의 필립스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가전업체. 1962년 세계 최초로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었고 82년에는 CD플레이어, 95년 DVD플레이어를 잇따라 개발하며 전자혁명을 이끌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경영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반도체를 비롯해 휴대폰 오디오 사업을 매각했고, TV와 CD플레이어는 외주 생산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선택한 것이 의료기기와 조명이었다. 구조조정이란 철수 매각 통폐합만이 전부일 수는 없으며, 회사의 미래를 위해선 접을 것은 접더라도 새로 시작할 것은 시작해야 한다. 필립스는 앞으로 건강과 안전, 환경문제가 중요해질 것을 보고 미래사업의 초점을 '라이프 스타일'비즈니스로 초점을 맞췄다. 14개 사업부를 조명, 의료기기, 가전 등 3가지로 줄인 결과 현재 필립스는 세계 1위 조명기업으로 부상했다.
하나의 사업이 영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금 잘 나가는 업종이라도 언젠가는 사라질 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미래를 먹여 살릴 분야, 이른바 '신수종'사업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그건 외국기업도 마찬가지다.
GE도 이제 더 이상 가전제품 회사가 아니다. 1990년대까지 성장동력이었던 금융과 가전, 산업소재 사업을 대폭 줄이고 헬스케어와 친환경에너지 분야로 완전히 돌아섰다.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은 지난 2003년 사업위원회를 신설해 신수종 사업을 주도했다. 각 사업 부문장은 매년 3개의 신사업을 발굴해 위원회에 보고하고 여기서 채택되면 신수종사업으로 중점 육성된다. 헬스케어와 친환경에너지도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2005년부터 추진한 친환경에너지 사업은 지난해까지 95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헬스케어에는 2015년까지 6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듀폰은 300년 역사를 가진 화학기업이다. 그러나 화학, 제약 등 주력 사업의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자 찰스 홀리데이 CEO는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농생명공학 및 대체에너지를 집중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듀퐁은 글로벌 기업 가운데 최초로 최고혁신책임자(CIO)란 자리를 신설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업도 기술이 진화하면 성장률이 떨어지므로 적절한 시기에 빠져 나와 새 사업군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 이후 듀폰은 60년간 주력사업이었던 섬유부문을 매각했고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제약에서 철수했다. 대신 종자와 바이오기업을 인수한 결과, 지난해 농생명공학 분야가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했다.
한때 943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일본의 IT업체 히타치는 2009년 10조엔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7,800억엔의 손실을 본 적자기업이었다. 이에 히타치는 반도체, LCD, PDP 등 설비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미국에서 흑자를 내던 하드디스크 사업까지도 처분했다. 대신 선택한 것은 친환경, 클라우드컴퓨팅, 스마트그리드 등 세상을 바꿀 혁신사업들. 히타치는 올해 6월 중장기경영계획을 통해 설비투자의 70%, 연구개발의 50%인 6,000억엔을 혁신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신수종사업 육성과정을 보면, 지난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투자하는 과정이 함께 이뤄진다는 것. 또 영업이익의 20%까지도 미래사업에 과감히 투자할 만큼 CEO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시장에도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신수종사업은 기존 사업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다"며 "GE 듀폰 IBM처럼 별도조직을 만들거나 자원을 독립적으로 투입해 신사업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 국내 기업은
국내 대기업들도 짧게는 5~10년, 길게는 20~30년 뒤를 내다보고 일찌감치'미래 먹거리'마련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중ㆍ장기 전략사업에 도전했을 당시만 해도 "설마 되겠어"라는 걱정과 우려가 앞섰지만 이제는 그룹 내 핵심사업으로 자리매김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 기업은 "그때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입을 모은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전자는 초기만 해도 아날로그 시계, TV, 오디오 등 소비용 제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83년 64Kb DRAM(PC에 주로 쓰이는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시장을 선도하는 반도체 제조업체로 또 한번 도약의 기틀을 다진 삼성전자는 이듬해 경기 용인과 기흥에 삼성 최초의 반도체 복합단지와 제조시설을 설립했다.
이런 공격적인 투자가 삼성전자를 D램 시장 세계 1위(92년), 낸드(NAND) 플래시 시장 세계 1위(2002년) 등 세계 반도체시장의 글로벌 선두주자로 도약할 수 있게 한 원동력. 삼성전자는 반도체 외에도 지난해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 5대 신수종 사업을 추가 확정, 차세대 신성장동력 분야로 집중 육성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직물과 화학섬유를 만들던 SK(당시 명칭은 선경). 그런 SK가 오늘날 재계 서열 3위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정유와 이동통신 덕이 컸다.
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ㆍ현 SK에너지)를 인수하면서 중화학공업 쪽으로 사업구조를 탈바꿈한 SK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동통신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99년 제2이동통신인 신세계통신(017) ▦2007년 국내2위 유선통신사업자인 하나로텔레콤(현 SK브로드밴드) 등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를 키웠다. 특히 최근 인수를 확정지은 하이닉스반도체는 미래 신수종 사업의 핵심으로 꼽히고 있다.
CJ는 이제 식품기업 이미지보다 홈쇼핑과 영화, 케이블TV, 물류, 외식 등 종합 생활문화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는 CJ E&M(Entertainment & Media) 사업 포트폴리오가 있는데, 94년 삼성과 경영권 분리를 마친 CJ(당시 제일제당)는 이듬해 미국 드림웍스사에 3억 달러를 투자, 영상산업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CJ엔터테인먼트,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극장 CGV, 국내 최대 방송프로그램공급업체인 CJ미디어, 음악전문 엠넷미디어 등을 주력업종으로 집중 육성했다. 그 결과 2000년 2.6%에 불과하던 관련 매출비중이 지난해 14.4%로 급증했다. CJ그룹 관계자는 "고부가가치 산업만이 미래 먹거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게 바로 문화 콘텐츠 사업이었다"고 말했다.
아직은 일반의 인식이 낮지만, 다른 대기업들도 진작부터 신수종 사업에 뛰어 들었다.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 조선업체이지만 배만 만들지는 않았다. 84년 산업용 로봇 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국내시장의 40%, 세계시장에서 5위를 기록하고 있고, 최근에는 의료용 로봇 사업에도 참여했다. 계열사인 현대종합상사로부터 해외 자원개발사업 부분을 독립시켜 현대자원개발을 설립해 그룹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화의 태양광발전 등 신수종 사업은 기업들에 있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환경 변화 등 미래를 먼저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는 창조적 기업문화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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