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모(33)씨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 건설업체의 통역사로 일하다 2004년 한국으로 넘어왔다. 북한 외무성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열살 때부터 러시아에서 학교를 다닌 김씨는 평양 외국어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전문가다. 북한의 건설업체에서 일 할 때 러시아 기업 측에서 "러시아인 통역과 한국인 통역을 다 고용해봤는데 이 사람만큼 통역을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으로 넘어온 김씨는 지금 일당을 받으며 에어컨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국내의 크고 작은 기업에 지원했지만 서류를 넣는 족족 탈락했고 힘들게 들어간 영세 여행사는 월급도 나오지 않아 도중에 그만뒀다.
김씨처럼 고등교육을 받고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하루벌이를 하는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우리 정부나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제대로 활용할 방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결과다.
1999년 탈북한 이모(34ㆍ여)씨는 노동당 전위조직인 조선직업총동맹에서 유치원생들을 상대로 김정일 우상화 교육을 담당했다. 화술이 좋고 활동적인 성격 때문에 북한에서도 강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이씨. 탈북 후 이씨는 서울 양천구 주민센터에서 월급 40여만원의 탈북자 상담 일을 하다 그만두고 호구지책으로 2006년부터 송파구의 한 식당에서 월 120만원을 받고 일하고 있다. 이씨는 "전쟁기념관에서 한국전쟁 홍보를 하는데 탈북자인 내가 하면 얼마나 살아있는 교육이 되겠느냐"며 아쉬워했다.
탈북자들이 좌절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편견과 차별적 대우가 그렇다. 일용직 인력시장에서 같은 동포인 재중동포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온 탈북자들은 기가 찰 노릇이다.
경기 부천시의 한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탈북자 최모(53ㆍ여)씨는 같이 일하는 50대 초반의 재중동포 여자들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넉 달 전 식당에 거의 같이 들어와 주방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이씨는 일당 4만원, 재중동포들은 일당 5만원을 받는다. 한 달에 25일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자신은 100만원을 벌지만 재중동포들은 125만원을 벌어 20%나 임금이 적은 셈이다. 이씨는 "인력시장 경쟁자들이 '탈북자들은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다'는 낭설을 퍼뜨려 한국인 식당 주인들이 차별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최근 노조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 다음주 중 고용노동부에 통일부를 사용자로 노조설립 신고를 내기로 하는 등 내부적으로 쌓인 불만이 표출되는 분위기다. 탈북자노조설립준비위원회 김기성(41) 사무국장은 "괜찮은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있는 탈북자는 1%도 안 된다"며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식당과 건설일용직,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이마저도 인구가 많은 조선족에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허경주기자 fairyh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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