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석학들이 모여 인류가 당면한 과제를 논의하고 인문학적 해결책을 모색한 제1회 세계인문학포럼이 26일 막을 내렸다. 교육과학기술부, 유네스코, 부산시가 공동 주최한 이번 포럼은 '다문화 세계에서의 보편주의(Universalism in a Multicultural World)'를 주제로 국내외 학자 87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24일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했다. 참가자들은 불확실성이 확산되는 시대에 인문학이 인간적 가치의 일신에 기여한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21세기 도전과제를 헤쳐 나가려면 대화와 협력을 통한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부산선언을 발표했다.
포럼에 각각 기조강연, 발표자로 참석한 프레드 달마이어(83) 노트르담대학 석좌교수와 알폰소 링기스(78) 펜실베니아주립대 명예교수를 만나 21세기 인문 정신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달마이어 "SNS붐 맹신 말라"
현상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달마이어 교수는 독일 태생으로 1954년 미국 유학 이후 줄곧 미국에서 활동했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 참석을 비롯해 몇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는 25일 '휴머니티의 인간화' 주제의 기조강연에서 다문화시대 소통을 위해 고전의 가르침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삶, 윤리, 정의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인간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인문학은 1960, 70년대가 전성기로 꼽히는데, 지금은 어떤가.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인문ㆍ사회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며 1960년대 인문학 전성기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 대학이 경영학이나 기술에 관심을 두면서 인문학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인문학부가 축소됐을 뿐 아니라 입학생도 줄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사회적, 민주적, 국제적인 삶을 사는 데 혜안을 주는 학문이니까."
-한국에서는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 별개로 인문학 대중 강좌가 성행하고 있다.
"알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가 있는데, 특히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다. 중국도 이와 비슷하게 비즈니스 스쿨에서 사람들이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잘하려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면서 2,3주 단기코스로 인문학을 공부한다. TV로 인문학 강연이 방영되기도 한다. 굉장히 흥미롭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인문학 대중 강연이 인문학의 전통을 남용하지 않는지 주의할 필요는 있다. 인문학은 본래 사람을 위한 학문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인문학을 치약 같은 상품처럼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특히 인문학 강연자는 인문학의 의미와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전자책 등 기술 발전이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인문학을 연구할 때 이런 변화에 영향 받지는 않는가.
"개인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고립되고 소외감을 느끼면서 SNS를 소통의 창구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관계는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고 SNS는 기존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절대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SNS에 따른 사회변화 역시 이집트 등의 '아랍의 봄'을 제외한 대다수는 제한적인 변화로 끝났다. SNS를 통한 인간관계는 가족, 지역, 공동체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기술문명으로 인해 인문학적 사고에 방해 받는 느낌이 들 때는 있다. 오늘도 기조강연을 하며 프리젠테이션을 사용했는데, 여러 기계 때문에 정작 내 논문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파워포인트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적합한 매체는 아닌 것 같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인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온라인 기술을 통한 소통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IT기술혁신을 비롯해 사회적 변화를 겪을 때 가치, 윤리, 정의에 대한 판단력이 필요한데 인문학이 바로 그런 판단력을 길러준다. 다문화시대에는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진 시민이 있어야 민주주의 정치가 가능하다. 시민이 어떤 정책이 좋고 누구를 리더로 뽑아야 할지 판단력이 없다면 미디어나 기업에 좌우되거나 사회가 독재로 빠질 수 있다."
▦링기스 "거짓 풍요와 진정한 풍요를 구분하라"
링기스 교수는 해석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힌다. 레비나스, 메를로-퐁티 등의 주요 저서를 영어로 옮기고 이들의 개념을 통합ㆍ발전시킨 여러 저서를 발표했다. 25일 '풍요의 시대'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그는 "다문화세계에서 거짓 풍요와 진정한 풍요를 구분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석학자라서 발표문이 추상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상당히 시사적이다. 월가 점령시위에 관한 분석도 상당부분 있다. 미국에서 이 시위의 영향력을 실감하는가.
"그렇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담론이 오가는데,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위의 본질적 원인은 부의 불균등 때문이다. 사람들은 금융자본주의로 인해 스스로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은 상위 1%가 전체 사회 부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칠레, 마드리드, 런던, 이스라엘로 퍼진 월가 점령 시위는 선진국 내 상당수 시민이 소외계층임을 방증하고 있다."
-'다문화세계에서 국민국가는 대개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발표문의 진단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
"여전히 국민국가의 경제 통제력은 있다. 문제는 점점 더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국적기업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서 공장을 이동하면서 선진국 산업 경제는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금융위기를 겪는 그리스, 스페인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선진국의 노동자는 자본가와 투쟁했지만, 이제는 더 값싼 제 3세계 노동자와 경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다국적기업에 대한 통제의 주체는 누가 돼야 하나.
"기업의 과세 문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법적 기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상적인 대안이라 현실에 실현할 때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웃음)"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새로운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거짓 풍요와 진정한 풍요를 구분하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현대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다. 하지만 부의 양극화도 가장 극심한 시대다. 풍요에는 진정한 풍요가 있고, 거짓 풍요가 있다. 상품을 통해 기쁨을 찾는 거짓 풍요는 시간일 지날수록 더 높은 구매를 유도할 뿐이다. 경기 침체기에 부유층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 남과 다름을 확인하는 '지위재'의 구매를 늘림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올해 미국 내 전체소득은 6.7% 감소한 반면 사치재 구매는 12% 증가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21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휴머니즘은 이 거짓 풍요에서 진정한 풍요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타인과 조우하고 다른 문화와 자연을 존중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으려는 노력이다. 이때 인문 정신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당장 눈앞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장기적인 사고를 하도록 한다."
부산=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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