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억세게도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아주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잖아요."
삼성전자 수원지원센터 인사팀의 김병호(45) 대리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매년 11월 개최하는 시각장애인 대상 PC경진대회 '삼성애니컴 페스티벌 2011'의 문제 출제 위원이자 시험감독관이다. 그에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원래 김 씨는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부에서 잘 나가던 개발자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공과대학을 나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그에겐 뜻하지 않는 불행이 찾아왔다. "특별한 이유 없이 조금씩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1년 정도 지나니 앞을 보기 어렵더라고요."
포도막염. 수정체와 망막 사이에 위치한 포도막에 염증이 생기면서 시력을 떨어지는, 하지만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치료조차 힘든 병이다.
2년간 휴직을 했지만 떨어지는 시력이 돌아오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당장 먹거나 입는 것마저 힘들었다. "무엇보다 힘든 건 한창 재롱을 피우던 네 살배기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의 얼굴을 다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죠. 솔직히 별별 생각을 다해봤습니다." 납득할 수 없게 찾아온 시련이기에 마음의 상처와 방황의 골은 더 깊어만 갔다.
김 씨가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아이들에겐 고통과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점자부터 보행까지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기초 재활교육을 받았다.
시각장애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안마사. 하지만 그는 이 통념을 깨고 싶었다.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사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PC교육. 인터넷 활용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해주기로 했다. 그는 회사 측에 시각장애인 전용 PC 교육을 제안했고, 회사는 1997년에 무료 시각장애인 PC 교실을 개설해 주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삼성전자는 그가 장애가 됐지만 내치지 않고 끝까지 껴안았다.
마침내 2005년 그의 제안에 따라 시각장애인 PC경진대회가 시작됐다. 시각장애인도 자격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 대회는 국내 유일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PC경진대회로, 올해로 7회째를 맞아 20만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김 대리는 "현재는 완전시력을 잃은 장애인들만 참석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약시 등 시력이 약한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 대상의 폭을 넓히고 싶다"며 "승부 그 자체보다 희망과 용기를 주는 대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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