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직 실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검찰은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제3의 외부세력이며 이들이 '정리해고 박살과 비정규직 폐지'등 현행법상 인정될 수 없는 주장을 했다고 명기했다.
검찰은 외부세력 운운 하면서 희망버스 운동을 두 사람의 지령에 따른 조직범죄인 양 취급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정리해고 박살과 비정규직 폐지'가 현행법상 인정될 수 없는 주장이라며 노골적으로 기업의 편을 들고 있다.
뭔가가 정말 '박살'났거나 '폐지'가 됐다면 모를까, 어떤 주장 자체가 어찌 불법일 수 있는가? 치졸하게 '박살'이나 '폐지'같은 과격한 단어를 골라 법원에 일러바치는 검찰의 모습은 기업의 편에 서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희망버스 운동은 기업의 부당한 해고 조치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싸움이 외로운 패배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시민들이 시작한 자발적인 사회적 연대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당신들의 주장이야말로 정치적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이 정치적 주장의 옳고 그름은 논쟁의 대상이지, 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검찰은 권력을 비판하는 시위를 언제나 조직범죄와 불법적 프로퍼갠더(선동자)로 규정하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또 하나의 정당처럼, 때로는 집권 여당보다 더 보수적인 정당처럼 행동해왔다.
그런데 검찰과 정당이 다른 점이 있다. 검찰은 정당과 달리 사람을 감옥에 가둘 수 있다. 정당은 투표로 단죄할 수 있지만 검찰은 그렇지 않다. 검찰의 정치적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관은 법원이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법원 또한 그리 신뢰할 만한 기관이 못된다.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실장에 대한 구속 조치는 사법 권력이 말하는 소위 치안 질서 유지가 기득권 '세력'의 이익 수호에 불과함을 증명한다.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정치적 편향성을 노골화하면서 기득권의 이익을 '단기적으로'수호할 때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추락할 것이며 '장기적으로'그들이 지키려는 기득권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러니 두 사람을 석방함이 여러모로 마땅하다. 그들이 또 모르는 것이 있다.
송 시인과 정 실장을 비롯한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는 정치적 목적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가 이름 붙여줄 때까진 이름도 없는,
그 작은, 보석 같은 꽃을 절대 놓치지 않고 싶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외부의 그 사소한 것들이
여기 우리 앞에 있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 '스물 한 개의 사랑시'에서
그 꽃의 이름은 소금꽃이다. 그 소금꽃은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저 높은 크레인 위에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너머'를 바라보았다. 희망버스 너머의 희망버스들,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려는 끝없는 사회적 연대를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희망 너머의 희망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었다.
심보선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