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신경숙 지음/문학동네 발행ㆍ286쪽ㆍ1만2,000원
지난 한 해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 출간으로 각국을 누비며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한 소설가 신경숙(48)씨가 단편소설집 <모르는 여인들> 을 출간했다. 소설집으로 치면 2003년 <종소리> 이후 8년만이다. 종소리> 모르는> 엄마를>
2007년부터 장편소설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를 잇따라 내며 장편의 산맥을 우뚝 세웠던 그 기간, 틈틈이 문예지에 발표했던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쉼 없이 달린 긴 마라톤 여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작업 같지만, 작가는 "가장 침울했을 때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쓰여졌다"고 말했다. 지인이 상을 당했을 때나 세상 일이 마음을 짓누를 때, 그 관계로부터 얼룩지고 쓰라린 마음을 푸는 대응이 글쓰기였다. '작가의 말'에서 신씨는 "이 작품을 쓰지 않으면 다른 시간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적었다. 어디선가> 엄마를> 리진>
2003년 발표된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2009년작 '세상 끝의 신발'까지 모두 7편이 실린 소설집은 작품간 발표 시차가 길게는 6년이지만, 숨결은 한결 같다. 이름 모를 타인의 자리를 돌아보고 그 맨발에 다가가고자 하는 애틋한 연민과 잔잔한 슬픔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안개처럼 퍼져온다. 신씨는 "작품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미하지만, 어느 순간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 교신망을 더듬는 것이 소설집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특히 이 교신의 신호음 역할을 하는 상징적 소재가 '신발'이다. 첫 머리에 실린 '세상 끝의 신발'에서는 우정, 회한, 그리움 등을 담은 다양한 신발-맨발의 에피소드가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6ㆍ25 소년병 시절 낙천이 아저씨는 생사의 기로에서 화자의 아버지에게 먼저 도망치라며 자신의 멀쩡한 신발을 벗어준 이후 둘도 없는 벗이 된다. 낙천이 아저씨의 딸 순옥 언니를 따랐던 '나'는 언니를 붙잡아 두기 위해 신발을 숨기는 일도 벌이는데, '나'는 그 이후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작품은 낙천이 아저씨와 순옥 부녀의 불우한 삶을 그리는데, '나'가 그들의 삶에 다가가는 고리가 신발이다.
표제작 '모르는 여인들'은 '나'가 20년 전 헤어진 옛 남자친구 '채'의 편지를 받아 다시 만나는 내용. 채는 가출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뒤늦게 그녀의 노트를 보고 알게 된 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에게 묻는다. 예전에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알면 지금의 아내가 떠나려는 이유도 알 것 같다며. 젊은 날 채가 군에서 휴가를 받아 나온 날, '나'가 채를 만나지도 않고 헤어졌던 이유는 "군화 속의 땀에 젖어 있을 채의 발가락을 연상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 그 맨발은 감당하기 힘든 일상의 고단함에 다름 아니다. 맨발의 벌거벗음에 도망쳤던 '나'가 수술을 받은 뒤 병원에 누운 남편의 발가락을 닦아주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 '어두워진 후에'는 살인마에게 가족을 잃고 떠도는 남자가 어느 사찰의 매표원인 여인에게서 조건 없는 환대를 받아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두말 없이 사찰 입장권, 저녁 식사, 잠자리, 차비까지 내주는 여자의 대접을 받은 남자는 종내 새 신발을 신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다짐한다. 소설집은 신발-맨발의 은유를 통해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과 그로부터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어떤 숙명적 과정을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울림으로 전한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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