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를 돈으로 보는 병원들… 의사인 나 자신조차 쇼킹했어요"
참말로 결기 충만한 올곧은 사람이다. 불의와 부조리에 주눅들지 않고 정면으로 화끈하게 승부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극히 필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의사(산업의학과 전문의)로서 한국 의료계의 민낯을 깡그리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하얀 정글'을 만든 감독 송윤희(32)씨 얘기다. 사실 환자는 한국에서 객체가 돼 버린 지 오래다. 누구도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이윤을 위한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러니 환자의 권리 같은 것은 외계인의 넋두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이 한심한 상황을 입바르게 까발린 것이 이 영화다. 물론 이런 현실을 물고늘어졌던 언론이나 시민운동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료계 자신은 굳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인 송씨가 직접 자아비판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부의 역적이 될 수 있는 싹을 스스로 키워 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수호하기 위해 산업의학과를 전공한 그의 과거 내력과 개업의나 큰 병원 의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건강과대안이라는 대안 연구 단체에서 상임연구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그의 지금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 실한 젊은이를 만나 '하얀 정글'과 그의 인생에 대해 살짝 들춰 봤다.
_어떤 계기로 이 시원한 영화를 만들었나.
"남편(이선웅ㆍ39 )을 통해 이길도씨의 팍팍한 사연을 듣고 나서였다. 남편은 안산의료생협 의사인데 하루는 걱정 그득한 얼굴로 이씨 얘기를 했다. 당뇨병인데 국가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의료급여는 작은 집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의료급여라는 게 완전히 쫄딱 망한 사람 아니면 해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건강보험이라도 돼야 하는데 당뇨병으로 오랜 기간 돈을 못 벌면서 건보료를 내지 못해 이 역시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국 몇 만원 치료비가 없어 병을 키우는 상황이었다. 남편도 이 사람 집에 몇 번이나 찾아갈 정도로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얘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의료급여도, 건보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의료 사각지대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_산업의학과 전문의고 현재 연구 단체에서 일하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험은 없지 않았나.
"지금은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으로 있어 임상진료와 거리가 있지만 산업의학과 레지턴트 할 때인 2006~2007년 임상파견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내과 주치의를 했었다. 당시에도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깊이 느꼈는데 남편에게 이씨 얘기를 듣고 난 뒤 귀가 번쩍 뜨였던 것이다."
_영화엔 이거 말고 다른 내용도 많던데.
"이 사람만 다루면 가난한 사람의 불쌍한 얘기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형적인 '인간극장'식 스토리 말이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는 근본 문제를 파고들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의료 체계 전반으로 시각을 넓혔다."
_장삿속이 된 한국 병원의 의료 현실에 대한 고발도 충격적이다.
"한 병원이 교수회의 때 의사들의 한달 수입 순위와 환자 수를 파워포인트로 보여 주면서 경쟁을 부추긴다는 부분인데 영화에는 의사들의 증언과 이들이 제공한 자료가 나온다. 이 장면을 직접 찍었으면 엄청났겠지만 증언과 자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의사들이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늘 검사 몇 건 했나, 그러면 월급을 얼마 더 받겠네 하고 세어 보게 된다'고 털어놓은 부분은 의사인 나 자신도 쇼킹했다."
_병원이 이렇게 무작정 실적 위주로 가도 돼나.
"경영을 생각하면 병원도 의사들의 환자 수가 얼마인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의사도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환자 수와 더불어 논문 등 다른 요소도 함께 평가됐는데 이제는 막가파식으로 가는 것이다."
_병원들의 편의주의를 지적하는 장면도 있다.
"우리 할머니가 백내장으로 한 대형 병원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병원은 국소마취는 안 한하고 전신만취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협심증이 있어 전신마취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심장 상태를 알기 위해 검사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100만원에 가까운 신장관류검사. 저렴한 신장초음파검사가 있는데도 이걸 했다. 이렇게 되니 백내장 수杏?수술받진 않았지만)보다 훨씬 비싼 검사를 받게 된 셈이다. 그리고 황당 시리즈의 절정은 병원의 결론. '전신마취는 안 좋겠네요. 그런데 우리 병원은 국소마취는 안 하니 안녕히 가세요.' 큰 병원들은 대개 이렇게 정해진 공정이 있고 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_30초 진료를 고발한 부분 역시 공감이 간다.
"몰래 카메라로 진찰받고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들의 불만 가득한 모습을 찍었다. 사실 환자들 병원 한번 가려면 오가는 시간, 대기 시간 포함해 2시간은 걸린다. 그런데 의사가 보는 것은 달랑 몇 십 초. 그렇다고 의사들 붙잡고 오래 질문할 분위기도 아니다. 뒤에 환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니."
_백혈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박진석씨의 사연은 정말 병원에 혀를 차게 하던데.
"병원은 원래 박씨에게 백혈병 치료를 위해 골수이식을 권했다. 7,000만원에서 1억원 든다고 했다. 하지만 하면 집안 완전히 거덜나고, 그렇다고 100% 산다는 보장도 없어 항암치료를 했는데 운 좋게 낳았다. 그런데 항암치료 진료비 청구서를 보니 비슷한 치료를 받은 옆 환자와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일일이 대조해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 병원에 따졌다. 그러자 병원은 '치료해 줬더니 뒤통수 친다' '다음에 재발하면 치료 안 해 준다'며 협박했다. 결국 박씨는 한국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진료비 확인 신청을 내 치료비의 절반이 훌쩍 넘는 1,900만원을 돌려받았다. 병원의 일상적 부당 청구와 문제가 생겼을 때의 무성의한 대응 방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_박씨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한국 의료 체계는 민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재정은 공공에서 맡는 이중구조인데 이게 문제다. 물론 병원이나 의사들 대부분 양심적으로 할 것이다. 그러나 박씨의 사례를 보면 안 그런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공공이 민간에 명확하게 선을 그어 줘야 한다. 이건 '하얀 전쟁'에 주제이기도 하다. 보다 공공 통제와 참여를 강화해 국민의 의료비 개인 부담을 삭감하고,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며, 병원이 이윤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_정부에서 의료 선진화 정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 영리의료법인 허용 문제도 다뤘다.
"앞서 말했듯 한국 의료 체계에서 공급은 민간이 하지만 재정은 공공의 영역이다. 돈을 공적으로 조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은 공공 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민영화는 그나마 남아 있는 55%의 공공 의료마저 완전히 허물겠다는 얘기다."
_공공 의료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의사를 공무원으로 하자, 뭐 이런 식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선진국 좋아하니까 얘긴데 대개 70%가 공공 의료다."
_처음과 끝이 수미일관인데.
"영화 시작할 때 천장 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두 손으로 모아 받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화 막바지에는 그 손이 천장을 뚫어 물이 콸콸 쏟아지도록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경제가 성장하면 넘쳐 흐른 물방울이 퍼져나갈 것이라는 트리클다운 이펙트의 허상을 깨라는 의미다. 물방울 몇 방울에 집착하지 말고 천장을 뚫어 물이 확 쏟아지게 하자는 말이다."
_편집돼 빠진 것 중 아까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선택진료비 부분이다. 이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보여 주려 했다. 시퀀스까지 만들었는데 통째로 잘라 내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큰 흐름에서는 결국 같은 맥락이어서 빼는 게 나았다."
_제목은 왜 '하얀 정글'인가.
"'하얀'은 의사 가운을 의미한다. '정글'은 전쟁터쯤. 의료계가 정글 같다는 얘기다."
_신문과 방송을 통해 다뤄진 얘기를 굳이 영화화한 이유는.
"언론은 과잉 진료, 상술화한 진료 같은 주제를 파편화해 다뤘다. 나는 이것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고 싶었다."
_의사라는 점이 이 영화를 만든 모티브인가.
"검사였다면 뭔 일 땜에 검찰을 나와 아마 검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사다 보니 이런 게 나왔다."
_미국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정조준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와 비교되던데.
"'식코'가 대중의 언어로 의료 체계의 모순을 정확하기 집어내고 있어 모티브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만큼 대중적 언어를 쓰진 못했다. 보장성 강화 같은 말은 내가 봐도 좀 그렇다."
_영화는 공부한 적이 있나.
"아주대 의대 다닐 때 영화에 미쳤다. 2001년 본과 2학년을 마친 뒤에는 반년 정도 독립 영화 워크숍에 참여해 단편 영화 두 편을 찍었다. 제목은'방안의 둘' '특별한 시간'인데 휴먼 드라마다. 사실 좀 끼가 있다. 글 쓰는 것 좋아하고, 고교 땐 연극도 했다."
_촬영 스태프 2명을 빼면 기획 구성 내레이션 편집까지 맡아 무척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완전 노가다였다."
_건강과대안에 나가면서 짬을 내 찍는 점도 어려웠을 텐데.
"그쪽에 민폐를 세게 끼쳤다. 8월에 기획을 하고. 9월 중순부터 10개월 정도 찍었는데 마지막 3개월은 못나갔다. 그땐 거의 매일 밤샜으니까."
_굉장히 빨리 찍은 편이다.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는 3년 촬영에 2년 편집이었다. 나는 이런 휴먼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주제를 파는 것이어서 좀 적게 걸렸다. 성질 급해 밤도 많이 샜고."
_처음엔 공동체 상영을 했다는데 어떻게 하는 건가.
"독립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극장에 안 걸린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10~50명씩 모여서 보는 것이다. '하얀 전쟁'은 주로 의료생협들과 노조 같은 진보 공동체들이 많이 봤다. 물론 일반 시민들도 봤다. 지금까지 64회를 했는데 보통 카페에 스크린 걸고 한다. 좀 상황이 좋은 덴 소극장 빌려서 하고."
_1일부터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는데 독립 영화로는 이례적이다.
"영화사 진진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 영화에 관심 있는데 극장 상영 어떠냐.' 당연히 좋다고 했다."
_왜 극장 상영하자고 했을까.
"지금까지 보면 다큐멘터리도 편중이다. 용산 참사는 4편이나 제작됐다. 반면 내 영화는 주제가 독특하다. 또 일반인들이 접근 불가능한 내용을 의사가 카메라 들고 찍었다는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
_극장에서 성공하려면 이 문제에 관심 없는 일반 관객이 많이 와야 한다.
"병원 다니면서 가슴 답답했던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이 찾을 것이다."
_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900만원인데 남편이 줬다. 우리 집에서 젤 부자니까."
_수익금은 어디 쓸 작정인가.
"비용 제외하고 전액 사회 환원하려 한다. 독립 영화계와 환자를 위해 쓰고 싶다."
_사람들의 응원이 벌써 쇄도한다고 들었다.
"내게 좀 과분한 칭찬인데 '당신 같은 의사가 필요하다'란 응원 글을 이메일이나 블로그 등을 통해 많이 보내 준다. 그런데 이게 '소영웅주의에 불과하다'는 욕도 부른다. 어쨋든 감사하다."
_의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한 의사와 인터넷으로 서로 리플을 달며 얘기를 이어간 적이 있다. 그 의사가 주장한 요지는 지나친 일반화에 대한 걱정이었다. 몇 개의 사례로 전체 의사한테 돌팔매를 보내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목적은 아닌데 그럴 소지가 있다면 죄송하다'고 했다."
_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다큐멘터리에 질렸다. 너무 힘들다. 인간이 할 짓이 못 된다. 나이 든 다음 내공이 쌓인 후 해야겠다. 당장은 극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가득 담긴 그런 드라마."
●송윤희는 누구
의대 나와 인기 과 전공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우리 뇌리에 콱 박혀 있는 의사의 전형이라면 송윤희씨는 이와는 꽤 거리가 있다. 그는 그보다는 사회적, 공익적 이슈에 머리 쾅쾅 부딪혀 가며 마이웨이 굳게 달리고 싶어하는 의사다.
서울 출신으로 공부 좀 했던 그의 어릴 적 꿈은 의료 선교. 의사가 돼 외롭고 어려운 지구촌 이웃에게 봉사하고 싶었다. 아주대 의대에 가게 된 것도 그런 이유. 그런데 대학에 간 이후 훌륭한 의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 깊숙이 똬리 틀고 있는 모순들을 목격하면서 그런 것들과 싸우고 노동자 계층을 대변할 수 있는 산업의학과가 확 박혀 버렸어요."
문제는 부모의 반대였다. "몸 생고생 안 하고 잠잘 수 있는 게 어디냐, 환자 죽는 거 안 봐도 된다, 사회가 변화하면 이 분야도 유망해질 거라고 꼬셨는데 다행히 넘어오셨어요."
덕분에 그는 서울대 의대 산업의학과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를 마칠 수 있었다.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해해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석사과정 졸업했다. 그리고 산업의학과 전공으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건강과대안에 자원봉사자로 들어갔다. 식품과 건강, 환경과 건강, 여성주의와 건강 등 포괄적 의료 이슈를 다루는 대안 연구 단체.
남편 이선웅씨는 서울대 산업의학과에서 만났다. "의사 같은 정체성이 안 보여서 끌렸어요."
그가 대학 때부터 영화를 한 것은 사회 모순을 다루는 데 적합한 매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나만의 공부가 영화를 만들고 싶게 했어요. 앞으로도 공부가 쌓일 때마다 영화로 분출해야죠."
이은호 선임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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