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해였다. 그러나 내게는 이치현의 '당신만이'의 해였다. 그전까지만해도 음악을 많이 듣는다는 우리들은 팝송을 더 좋아했다. 가요는 세시봉 세대에서 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조용필이 나타났고, 이치현이 나타난거다. 조용필은 이미'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가 되긴 했지만, 노래의 분위기는 새롭지 않았었다.
하지만 '창밖의 여자'는 달랐다. 청파동 숙명여대앞 레코드가게 스피커에서 울리는 '창밖의 여자'를 처음 들으며 아, 이 노래 뭐지? 하며 발걸음을 멈췄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그 노래도 어른들의 노래였다. 그러다 우리 청춘들 마음속으로 들어온 노래가 이치현과 벗님들의 '당신만이'였다.
'당신만이'는 고급스러웠다. 고급스럽다는 기준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객관적 답을 내놓기 힘들겠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이치현과 벗님들'을 아느냐, 모르냐가 일종의 음악을 듣는 수준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일단, 가사가 맑았다. 칙칙함이나 우울함, 한국 대중가요를 관통하는 한의 정서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멜로디는 경쾌하면서도 따뜻하고 색달랐다.
그동안 들었던 가요의 멜로디 라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연주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80년 이치현이 등장함으로써 더 이상 우리는 팝송에 기죽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분위기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때는 가요 좋아한다는 말을 고교생, 대학생들은 잘 하지 못했었다. 그랬던 우리가 '당신만이'를 들으면서 가요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가끔 이치현과 93년 데뷔한 김동률이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학구적인 외모도 비슷하고 음악의 깊이나 당시의 가요사에 신선한 충격을 준 점도 비슷하고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면서 골수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두 사람을 견주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두 가수 모두 데뷔하면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점이 같다.
그렇게 화려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던 이치현이 '당신만이'이후 어쩐지 잠잠했었다. 그러나 이치현은 보란 듯이 또한번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86년 '사랑의 슬픔'을 발표한 것이다. '하늘에 흰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대표적인 겨울노래다.
우리 프로그램에도 최근 신청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고교 때 열광했던 그 가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즈음, 그 어른으로서 겪는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 있던 즈음, 바로 그가 다시 나타나 위로처럼 들려준 노래가 '사랑의 슬픔'이다.
이후 이치현은 '집시여인'으로 메가톤급 히트를 치지만,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94년 언플러그드 음반 중 '진실한 사랑'이라는 곡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 서로 사랑한다면 진실한 사랑을 해요, 서로를 위한 사랑을 해요.'로 시작되는 이곡은 그냥 묻혀버린 감이 있어서 너무 아깝다. 개인적으론 이치현의 음악 중 가장 성숙하고 깊이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사가 아름답다. '우리 서로 사랑한다면 느끼는 사랑을 해요. 내 자신부터 희생을 해요. 잊어도 될말한 말들만 기억하지 말아요. 어쩔수 없이 한 말도 많았어요.'
내 10대와 20대를 회상하는 비디오를 찍는다면 그 배경음악은 '당신만이'와 '사랑의 슬픔'이다.
조휴정ㆍKBS해피FM 106.1 '즐거운 저녁길 이택림입니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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