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 월터 웽거린 주니어 지음·이명 옮김/포이에마 발행 · 256쪽 · 1만1000원
죽음이란 참으로 제 각각이어서 어떤 죽음이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아닐지 모른다. 천수를 누렸다고 할 만큼 많은 나이까지 큰 병치레 없이 살다가 잠든 사이 주위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두고 호상(好喪)이라 한다. 그런 복 받은 죽음과 반대로 젊어서 사고로 비명횡사하는 사람도 있다.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남은 삶을 지나온 시간보다 더 행복하고 보람되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비통으로 지새는 경우도 있다.
만약 죽음에도, 사람이 죽어가는 데에도 좋은 모델이라는 게 있다면 이 책을 쓴 저자야말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인디애나주 발파라이소대학 교수이며 목사, 저술가인 월터 웽거린 주니어는 2006년 손주와 장을 보러 갔다가 자신의 쇄골 부근에서 망울을 발견한다. 이상을 감지하고 주치의를 통해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암이었다. 폐에서 시작된 암세포는 림프절까지 전이되었다. '3기B'. 말기에 가까워 수술은 불가능했고 항암 약물과 방사선 치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는 암을 발견하고 난 뒤 치료해 가는 과정과 고통스러운 나날, 거기서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그때그때 글로 옮겨 친구들과 친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 는 신앙심 깊은 한 기독교인의 암 투병기이자, 종교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민하게 될 삶과 죽음에 대한 농밀한 사색의 기록이다. 암의>
암 환자는 치료 과정에서 어떤 고통에 맞닥뜨릴까. 그는 항암 약물과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으로 생겨난 고통을 '말들이 흉골에서 춤을 추면서 등뼈까지 뛰어올라가'고 '번개가 넓적다리를 내려와 무릎뼈를 세게 치'는 통증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등 아래로 기어 내려가 엉치뼈 속으로 파고'든다고 표현했다.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위의 모든 것이 소중하다. 어느 날 그는 손주 에마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고, 영문도 모르고 내민 에마의 손을 10분이나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에마의 영혼에 다가간 듯' 느낀다.
의사와 겪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암 진단을 내릴 때의 의사를 그는 잊지 못했다. 단호하고 공격적인 듯이 보이는 그 의사는 땅을 보고 급하게 걸었고 환자에게 말할 때도 눈을 마주치는 대신 무심히 컴퓨터에 시선을 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큼이나 딱딱한 눈빛으로 '차갑고, 단호하고, 과학적인 진단'을 읊었다. 당신은 이제 얼마 살지 못할 지 모른다는 선고를. 항암 치료 후 왜 바로 결과를 알기 힘든지 거듭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의사에게는 짜증이 났다. 그는 그냥 불안한 환자의 마음을 이해해주기 바랐을 뿐이었다.
암 환자가 겪는 하루하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다.
'삶을 휘어 감는 최후통첩을 받을 준비가 전혀 안 되었을 때, 일상에 끼어드는 죽음은 괴물과 같다. 그러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죽음에 대항해 싸운다. 죽음을 증오한다.…친구들과 조물주에게 울부짖고, 애원하고, 간청하고, 흥정한다. 그 다음에는 절망으로 가라앉는다. 무력감에 빠지고, 실제로 죽음이 찾아오기도 전에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만다. 그러지 않으려면 준비해야 한다.'
그에게 죽음은 실재가 아니다. 삶과 대조되는 개념일 뿐이다. '죽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고 똑바로 직시해야 할 때, …그때도 근본적으로 직면해야 할 것은 삶이야! 죽음으로 둘러싸인 이 삶 말이야!' 그렇게 삶을 바라볼 때 '자아와 시간과 목적'은 단순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많은 환자들이 암과 싸워 이기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암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암은 '내 몸에 있는 다른 모든 조직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일부이며 바로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인 나의 것'이다. 그는 병이 영적으로 명료해지도록 자신을 깨우고, 깊은 묵상으로 자신을 인도하며 기도하게 하고 감사하게 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암과 싸우는 걸까. 진짜 적은 암이 아니라 암이 드러내는 어떤 사실이야. 인간은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
'내 이야기는 곧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다'며 책을 시작한 그는 에필로그(2008년 4월 15일)에서 이렇게 썼다. '안정적이다. 내 암에 있는 종양은 잠을 자고 있다. 세상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나는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지금도 살아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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