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운명이다. 미국 눈밖에 나서 비참한 말로를 보낸 제3세계 지도자가 여럿 있지만 살아서 갖은 치욕을 당하기로는 마누엘 노리에가(77) 전 파나마 대통령 만한 경우가 없다. 대통령 재임 중 미군에 체포돼 미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다시 프랑스로 송환돼 유죄 판결을 받은 노리에가는 이번에는 고국으로 송환돼 얼마 남지 않은 여생마저 가택연금 상태로 보내야 할 처지에 빠졌다.
BBC 방송에 따르면, 23일 프랑스 법원은 파나마 정부가 요청한 노리에가 송환 요청을 최종 승인했다. 노리에가의 신병을 프랑스에 넘겨 준 미국이 송환에 동의했고,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가 송환 명령서에 서명한 상태여서 노리에가의 파나마행을 위한 모든 법적 절차는 마무리됐다. 파나마 정부는 올해 안에 노리에가의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노리에가는 그곳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 파나마 정부가 노리에가에 적용한 혐의는 크게 두 가지. 대통령 재직 중이던 1983~89년 쿠데타를 일으킨 모이세스 지롤디 소령의 처형을 승인하고 반정부운동가 우고 스파디포라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두 혐의 모두 유죄가 인정되면 각각 2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데, 노리에가의 경우 고령을 이유로 가택연금형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노리에가는 90년 미군에 마약밀매 혐의로 체포돼 미국 법원에서 징역 40년형을 선고받고 17년을 복역한 뒤 2010년 가석방됐다. 그러나 곧바로 프랑스로 송환돼 돈세탁 혐의로 또 7년을 선고받았다. 각국이 적용한 혐의가 달라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노리에가는 말년에 전세계 이곳 저곳을 돌며 세번째로 죗값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노리에가는 친미로 시작했다가 미국 정부에 용도 폐기된 대표적 제3세계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청년시절 미국에서 정보ㆍ방첩 교육을 받았고 페루에서는 미 중앙정보국(CIA)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70년대 파나마 지도자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 수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노리에가는 토리호스가 81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반공정책을 고수했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행정부 입장에서는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중미 좌파정권 견제를 위해 노리에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미 의회가 “미국에서 밀거래되는 상당수 마약의 배후에 노리에가가 있다”는 보고서를 내는 등 마약밀매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노리에가의 악행이 하나 둘 알려지며 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은 노리에가의 효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해 그를 버리게 된다. 89년 12월 아버지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 선전포고 없이 병력 2만명을 동원해 파나마를 침공했고, 노리에가는 이듬해 1월 파나마시티의 바티칸 대사관에서 은신 중 체포 돼 미국으로 압송됐다. 당시 미군의 공격으로 민간인 200여명이 사망했는데, 유엔은 미군 침공을 ‘중대한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 비난 성명을 채택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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