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태어난 해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베일에 싸인 존재다. 기록도 많지 않다. 몰락한 진골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거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관심법(觀心法)으로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고 한다. 역사 속 궁예는 부인과 두 아이의 목숨을 빼앗은 '패륜의 폭군'이다.
궁예는 정말 미치광이 군주였을까. 최근 전남 강진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에서 궁예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단서가 발견됐다. 24일 밤 10시 방송하는 KBS 1TV '역사스페셜'은 베일 속에 가려진 궁예의 실체를 파헤친다.
신라 말 명승 선각대사의 행적을 적은 비문에는 '삼국사기' '고려사'로만 전해졌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의 비화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왕을 가리키는 표현이 두 개 있다.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다. 당시 왕이었던 왕건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목포대 최연식 교수는 '대왕'이 궁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최 교수의 해석대로라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는 초석이 된 912년 나주 공략은 궁예가 지휘한 것이 된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뒤바뀌는 것이다.
궁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자신이 키운 장군인 왕건에게 몰리고 믿었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은 왕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궁예가 한반도의 중원을 차지하고 서남해 지역을 장악한 사실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최 교수는 궁예가 적어도 고려 초까지는'대왕'으로 불릴 만큼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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