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많이 발생하는 겨울. 게다가 올 겨울엔 전력 대란까지 예고되면서 고층건물 승강기 운행 중단 등 비상상황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비한 건물의 관리 규정이 현실과 따로 놀거나 기관 간 엇박자까지 노출돼 대책 부족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 26층짜리 건물. 건물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잠겨 있었다. 이 빌딩의 건물관리 직원은 "옥상으로 몰래 들어가려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원래부터 옥상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일 이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소방서 관계자는 "연기는 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옥상 대피 길이 막히면 시민들이 위험해진다"며 "소방방재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소방방재법에 따르면 화재 때 위로 치솟는 열과 연기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닫아두되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난 9일 역삼동 18층짜리 건물 외부 에어컨 실외기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표적. 연기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 위층으로 계속 퍼졌지만 대피하던 입주자들은 옥상 출입문이 열리지 않아 20분간 공포에 떨었다. 17층 비상구 쪽에서 구조를 기다렸던 김모(39)씨는 "연기는 올라오는데 옥상 문은 열리지 않았고, 만약 연기가 더 퍼졌다면 우리는 오갈 데가 없어 큰일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경찰과 소방서의 입장 차이도 시민들을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다. 특히 일부 경찰은 "투신자살 방지나 사건 예방을 위해 옥상 문을 잠가 둬야 한다"고 주장해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다.
비상 상황 시 고층건물에서 자가 발전기로 위험을 방지해야 하는 규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건축법은 31m 이상 고층건물과 10층 이상 아파트의 경우 정전이 나면 자가 발전을 통해 2시간 동안 비상용 승강기가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자가 발전 장비를 갖추고 있는 서울 서초구의 15층 아파트의 한 주민은 "지난 9월15일 전국적인 정전 때 승강기가 중간에 멈춘 뒤 자가발전 장비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부 전원이 완전히 끊겨야 자가발전기가 작동하지만 당시 외부전원의 공급과 차단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면서 자가발전기가 가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접수된 승강기 구조요청 685건 가운데 38.5%인 264건이 고층건물에서 접수된 것이다.
더욱이 화재 발생시 승강기 통로를 타고 빠르게 올라오는 연기는 승강기 내 시민들을 순식간에 질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하지만 화재 발생 시 승객용 승강기를 수동이든 자동이든 피난층인 1층으로 내릴 수 있도록 별도의 장비를 만들도록 하는 법규정도 없다. 승강기 안전관리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도 승객용 승강기의 피난층 강제 규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구재현 목원대 소방학과 교수는 "유독가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승강기 내에 산소공급장치를 설치하고, 승객용 승강기의 피난층 운행 관련 법적 기준을 마련하고, 건물 내 화재 정보를 스마트폰 등으로 실시간 알 수 있게 하는 소방환경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허경주기자 fairyh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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