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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 1년…연평부대 가보니/ 병력 1600명으로 늘리고 하나뿐이던 K-9중대도 여러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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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 1년…연평부대 가보니/ 병력 1600명으로 늘리고 하나뿐이던 K-9중대도 여러개로

입력
2011.11.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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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왔다. 우리 것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해병 연평부대 포7중대. 상황실에서 사격훈련을 지휘하던 중대장 김정수(30) 대위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멀리서부터 하늘이 찢기는 듯한 금속성의 마찰음이 연이어 나더니 '쿵, 쾅'하며 사방에서 땅을 울리는 굉음이 들렸다.

지난 15일 연평부대에서 만난 김 대위는 1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영화 '쥬라기공원'의 공룡 발자국 소리 같았다. 포탄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고 말했다.

김 대위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중대 안에 있는 K-9자주포 6문 중 4문 옆에 포탄이 1발씩 떨어져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이건 실전이다.' 바닥에 박혀 있는 포탄은 북한군의 122㎜ 방사포였다. 중대 외곽에 떨어진 것까지 합치면 20여발은 되는 듯했다. 포상(포 진지) 주변에는 포탄에서 터져나온 소위 계급장 모양의 파편이 수천 개씩 튀어 벌집처럼 박혀 있었고, 방호벽으로 만들어 놓은 고무타이어에서는 불이 붙어 검고 역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소산(대피)하라." 병사들이 일단 포상 안으로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앞서 오후 2시30분쯤 K-9자주포 4포가 격발이 안돼 모든 훈련이 중단되면서 잠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한동안 계속됐다. 북한군의 포격 후 13분이 지난 오후 2시47분, 2포 5포 6포가 포신을 서남쪽에서 북쪽으로 돌려 대응사격에 나섰다. 가장 먼저 적의 공격을 받았던 3포는 충격으로 구동케이블이 끊겨 수동모드로 전환한 뒤 합류했다. 완전자동식인 K-9자주포가 15초에 3발을 쏠 수 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병사들은 어떻게든 북쪽을 향해 포신을 겨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2포반장 이완섭(27) 하사는 벌떡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침착하지 않으면 해보나 마나 지는 싸움이었다. 이 하사는 "적을 향해 실제 포를 쏜 것은 처음이었다. K-9포 안에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4명의 병사들을 보며 나 자신부터 냉정함을 찾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이날 포7중대의 K-9자주포는 북한군 진지를 향해 모두 80여발을 쐈다. 김 대위는 "우리는 연평도의 유일한 K-9 중대였다. 보통 한 진지가 공격 당하면 다른 진지에서 대응사격에 나서야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해병대는 이날 포격 이후 연평도의 K-9 중대를 섬 곳곳에 여러 개로 늘려 배치했다.

하지만 대응사격에 13분이나 걸린 점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억울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동시타격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13분의 치욕'이라는 세간의 지탄을 보란 듯이 씻어내기 위해 모든 대원들이 초겨울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K-9 위에서 16일 동안 대기했다. 끼니는 전투식량이 전부였다.

포 전술교관 김상혁(32) 중사는 "춥고 배고팠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오히려 '한번만 더 건드려봐라. 이번에는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뭉쳤다"고 말했다. 김 중사는 "또 한번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면 2분 안에 격발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격발 불량으로 끝내 대응사격에 합류하지 못한 4포 대원들은 회한에 사무쳤다.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가슴을 치며 속으로 울었다. 김 대위는 "대원들이 포를 쏘겠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장비를 고치는 게 우선이었다. 동료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분노를 삭혀야 했다"고 전했다.

1년이 지났지만 연평부대는 그날 포격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직격탄을 맞은 이발소 옆 화장실 건물은 천장에 지름 2m 크기의 구멍이 뚫려 철근이 너덜너덜하게 늘어졌고 벽도 심하게 부서졌다. 다행히 포격 당시 아무도 없어 화를 면했다. 부대는 이 공간을 안보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대 주변 야산도 포탄과 화염에 검게 그을려 민둥산으로 변했다. 포상 입구와 주변 바닥의 콘크리트도 곳곳이 깊숙이 패인 채 말없이 그날의 참상을 전하고 있었다.

북한의 기습 도발은 부대원들의 마음 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 병사는 "한동안은 내무실 문을 조금만 세게 닫아도 화들짝 놀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연평부대는 훨씬 강해졌다. 치료를 받은 병사 8명 중 5명이 자원해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부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연평부대를 선택했고, 부대원들은 그들과 부둥켜 안으며 끈끈한 전우애를 확인했다.

仕?볼과 입 주위에 파편이 박혀 두 달간 병원치료를 받았던 한규동(21) 병장은 "부모님은 말렸지만 동료들이 있는 이곳이 좋았다"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이제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양쪽 볼과 사타구니, 왼쪽 무릎을 다친 이한(21) 병장은 "해병대에 왔기 때문에 포격을 받은 게 아니라 해병대이기 때문에 포격을 당해도 살아남은 것"이라며 "이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해병대에 보내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부대 밖으로 나와 10여분쯤 차를 달려 연평도 최북단에 나직이 솟아있는 방공포 진지에 올랐다. 12㎞ 정도 떨어져 있는 북한의 옹진반도가 손에 잡힐 듯 한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연평도를 향해 북한군의 해안포가 무차별로 불을 뿜었던 곳이다.

연평도와 옹진반도 사이에는 몇 개의 무인도가 있다. 가장 가까운 석도는 연평도와 불과 3㎞ 거리. 석도와 연평도의 중간을 북방한계선(NLL)이 지나고 있다. 군은 포격 이후 연평도 병력을 1,300여명에서 1,600여명으로 늘리고 훈련도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섬을 떠나기 전에 병사들이 이용하는 식당에 들렀다. 배식대 위 유리창에는 '11월 23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는 큼지막한 글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하루 세 번씩 이 말을 곱씹으며 그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연평도=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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