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태생이 남 다르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인 조선 중엽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먼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인들은 전통 유교문화를 파괴한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제 한국 천주교인이 50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한국 천주교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파리외방전교회와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찾았다.
19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중심가 뤼드 박(Rue du Bac) 128번지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 본부를 찾았다. 이곳은 1658년 교구 소속 신부들로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결성돼 4,300여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지역에 파견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가장 많은 성인(聖人)이 나왔다고 해서 '순교 전문대학'이라고 불린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처음 들어설 당시만 해도 파리 외곽의 변두리였던 이 지역은 이제 대형 백화점과 각국 대사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육중해 보이는 짙은 갈색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물관과 성당 건물이 바로 마주하고 있다. 그 옆 창살 너머로 본부 건물 출입구가 보였다.
본부 1층 사무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조르주 콜롱(58) 신부를 만났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모습이 천상 신부인 콜롱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 천주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문을 열었다. 콜롱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한국에 파견한 선교사 가운데 10명의 순교 성인이 나온 것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다진 고귀한 희생이었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천주교회와의 인연은 1831년 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 대목구장(대교구장)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천주교 신자들이 로마교황청에 먼저 자발적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해 이뤄진 일이었는데, 이는 전 세계 가톨릭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 천주교인들의 선교사 파견 요청에 감동한 파리외방전교회는 170여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보냈고, 그 중 12명이 한국 땅에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 가운데 앵베르, 모방, 샤스탕, 베르뇌, 랑페르 드 브레트니에르, 도리, 다블뤼, 볼리외, 위앵, 오매트르 등 10명은 1984년 성인에 시성됐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순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전교회 회원들은 본부 정원의 팔각정에 모여 "나는 하느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Te Deum Laudaus)로 시작하는 감사의 찬송가 '떼 데움'을 소리 높여 불렀다고 한다.
콜롱 신부는 "선교사 파견을 간곡히 요청하는 한국 천주교인들의 신앙심이 브뤼기에르,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의 심장을 울렸고 한국에 가면 순교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선교를 자청하도록 만들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이런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자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돼 현재 한국 천주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40여분간의 인터뷰를 마친 뒤 박물관 위층에 마련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전교회 선교사들이 회원들과 가족들의 눈물과 기도 속에서 파견미사를 올리던 곳이다. 성당 입구 왼쪽 벽면 샤를 쿠베르탱이 그렸다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이를 통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머나먼 동양의 '은둔의 나라'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들의 비장한 심정이 헤아려졌다.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은 이 성당에서 파견미사와 파견식을 거행하고 본부 정원의 성모상 앞에서 회원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올린 뒤, 보르도 항구를 거쳐 선교지로 향했다.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라는 파견송이 울리는 가운데….
파리(프랑스)=글ㆍ사진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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