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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최종 대부자로서의 E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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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최종 대부자로서의 ECB

입력
2011.11.2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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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현상은 통화 증발의 재앙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사례다. 상품 가격이 하루에도 몇 번씩 뛰어올라, 아침에 6,000마르크를 주고 조간신문을 샀는데 저녁에 석간신문은 13만 마르크를 주고 사야 할 정도였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다

이 같은 물가 급등은 마르크화의 가치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다. 19년 1월 미화 1달러 당 9마르크였던 환율이 이듬해 1월 65마르크가 되더니, 22년 1월에는 190마르크, 1923년 1월에는 1만8,000마르크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아무도 달러를 마르크로 바꾸려 하지 않자 마르크는 완전히 무가치한 통화가 돼 23년 8월에는 1달러 당 462만 마르크, 9월에는 250억 마르크, 11월에는 무려 4조2,000억 마르크를 기록했다.

이런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나치라는 극우 파시즘까지 잉태됐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인플레이션과 통화 증발에 대한 독일 정부의 거부감은 트라우마에 가깝다.

유로존이 유럽 재정위기의 마지막 남은 하나의 해결책을 선뜻 내놓지 못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화를 추가로 찍어내는 것뿐이다.

ECB는 유로존의 최종 대부자다. 최종 대부자는 금융위기로 패닉이 발생할 때 필요한 만큼의 통화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 즉 통화가치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지만, 최종 대부자로서의 역할 역시 중앙은행의 중요한 기능이다.

다행히 지금은 웬만큼 통화가 증발돼도 유로화 가치의 폭락이나 물가 급등은 없을 것이다. ECB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유로화 출범 당시 ECB가 목표로 했던 환율은 1유로 당 1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해서 99년 1월 1유로 당 1.18달러로 출발했던 유로화 가치는 2001년 한때 0.8달러까지 떨어졌지만 2003년 이후 줄곧 1달러를 넘어서 지금도 1.3달러 선을 웃돌고 있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신용 확대 정책을 감안하면 ECB의 운신 폭은 좀더 여유롭다.

문제는 얼마만큼의 통화를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언제 공급해줘야 하는가다. 누구에게는 정해져 있다.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에게 제공될 것이다. 조건은 통화 공급의 방법에 따라 약간 달라지겠지만, 가령 ECB가 이들 국가의 국채를 시장 금리로 인수하는 방식이라면 벌칙적 금리를 부담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규모와 시점만 남는다.

금융위기 때마다 중앙은행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은 늘 "너무 모자랐고,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사실 최종 대부자가 부딪치는 딜레마는 "얼마가 충분한지, 언제가 적기인지"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규모는 이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1조 유로로 늘리기로 했으니, 적어도 이보다는 커야 할 것이다. 미국의 최종 대부자인 연방준비제도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사실상 제한없이 통화를 공급해 패닉을 막았다.

통화 공급의 타이밍이 가장 중요

핵심은 시점이다. 너무 이른 시점에 개입하면 자칫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도덕적 해이도 고려해야 하지만, 원칙과 전례가 깨진다는 것도 문제다. 당장 패닉을 멈추기 위해서는 돈을 무제한으로 빌려줘야겠지만, 앞으로 패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자체 시스템에 맡겨둬야 한다.

그렇다고 시장을 굶겨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게 중앙은행의 딜레마다. 오늘의 패닉이 내일의 정상적인 시장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경제사가인 찰스 킨들버거는 "시점 선택은 예술이다. 이 말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갈파했다. 지금 ECB가 가장 고민하는 것도 통화 공급의 타이밍일 것이다.

박정태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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