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응급실 당직의사'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글을 띄웠다. 고교 성적이 상위 1%였고 6년 동안 의대에 다니며 엄청난 양의 공부를 소화했는데, 밤을 꼬박 새며 주 70시간 일한 대가가 월 500만원이라는 하소연이었다. 월급 의사는 복리후생이나 퇴직금도 없어 삼성전자에 다니는 자신의 지방 공대 출신 친구보다 못하다는 탄식도 곁들였다.
월 500만원은 적은 수입이 아니며 월 수천 만원씩 버는 의사도 많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이 당직의사의 호소에 공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의사가 되기 위해 투입한 비용과 노력, 과거 선배 의사들의 고소득을 감안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처지가 이해된다는 지적이었다.
요즘 동창 모임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사'자 직업의 친구들을 만나보면 마음 편히 지내는 경우를 좀체 보기 힘들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한의대에 진학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한 친구는 한의원 수입으로 아이들을 키우기 힘들다며 틈만 나면 주식 투자에 매달린다. 임대료와 간호사 인건비, 재료비 등의 부담은 갈수록 커지는데, 한의사 수가 늘면서 환자들은 오히려 줄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의 경우 한의원 100곳이 개업하면 75곳이 문을 닫을 정도로 한의원 폐업률이 높았다.
의사ㆍ변호사도 "미래가 두렵다"
변호사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죽도록 공부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격증을 땄는데, 수입은 갈수록 줄고 연금과 같은 노후 보장책도 없다 보니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내년부터 로스쿨에서 1,500명 이상의 변호사가 쏟아져 나오면 수입은 더 줄어들 게 분명하다. '억대 연봉'의 상징인 대기업 임원들도 "언제 잘릴 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라며 노심초사하긴 마찬가지다.
'불안사회'.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 불안감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바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생활비 중 지출이 가장 큰 항목은 식료품비다. 이어 교육비, 의료비, 주거비 순으로 지출 비중이 높다. 하나같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만일 소득이 끊기거나 줄어들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너나없이 불안에 떠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의사나 변호사조차 앞으로 경쟁이 더 치열해져 소득이 줄어들면 안정된 노후를 보장받기 어렵다며 불안해하는 현실이니, 평범한 샐러리맨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국민의 99%가 불안에 떠는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런 불안감 탓에 다들 죽기살기로 돈 벌이에 매달리고 자녀에게도 공부와 성공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 극심한 경쟁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탈적 착취 행위가 만연하는 가장 큰 이유다.
불안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유럽처럼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요즘 논의되는 보편적 복지는 바로 국민 기본생활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떠안겠다는 뜻이다.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적극 공급하고 가계 압박의 주범인 사교육을 공교육의 영역으로 흡수하며 과도한 의료비 지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증세 없이 보편적 복지 불가능
여기에는 당연히 지금보다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문제는 우리 경제가 과거와 같은 고속성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2~4%대 성장이 지속되는 '저성장 시대'가 곧 찾아올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와 저출산 탓에 복지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국민 다수를 불행하게 만드는 국가 자원배분의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수십 년간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에 집중했던 재정과 세제정책을 고용과 분배 위주로 뜯어고쳐야 한다. 여권 일각에서 제기한 '한국형 버핏세'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금 불안사회와 복지사회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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